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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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는 버들치 시인을 보면 일견 답답해하면서도 좋아하고, 볼 때마다 존경을 표하는 이유가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고 남의 것을 남의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어지러운 시절에 그건 너무도 귀한 덕목이라고. 맞는 말이다.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이유는 그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규칙을 너도 나도 지키고 살지 못하기 때문일 터, 통장에 자신의 관값 200만 원을 가지고 산다는 버들치 시인이 새삼 달리 보이는 것도 다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몇 해 전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재미있게 읽었던 나는 버들치 시인(박남준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읽은 게 없어도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나이에 이르러 이제 나는 안다. 삶은 실은 많은 허접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내 남은 생에 소망이 있다면 그중 무엇이 허접하지 않은지 식별할 눈을 얻는 것인데, 여기 새벽강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중 몇 개를 건져 올리는 기분이었다." (p.85)

 

<시인의 밥상>은 시인이 차려낸 스물네 가지 음식과 소중한 사람들과 그 음식을 맛보며 귀한 시간을 보낸 작가의 추억이 어우러져 또 다른 글맛을 더한다. <지리산 행복학교> 이후 지리산으로의 발길을 끊었던 작가가 매달 그곳으로 달려가 시인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밥상을 차리며 다함께 나눴던 삶의 이야기는 된장이나 간장처럼 곰삭은 맛,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웅숭깊은 맛이었다. 작가가 초대하는 시인의 밥상머리에는 정에 허기진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안겨준다.

 

"우리들은 말없이 남은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다. 여름 해가 길게 지고 있었다. 늙어가는 것이 아름답다는 건 어떤 것일까. 씨앗이 바위를 뚫은 게 아니라 늙은 것이 어린 것을 위해 필사의 힘으로 생명을 키워낸 것, 그것이 늙음의 아름다움 아닐까? 문암송 곁에는 바람이 차게 식었다가 불어왔다." (p.295)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여름까지 작가를 비롯하여 박남준 시인, '내비도' 교주 최도사, 사진작가 숯팁, 거제도 제이(J)는 지리산, 거제도, 전주, 거문도, 평창, 서울 등을 오가며 밥상을 차렸다. 거문도에서 소설가 한창훈을 만나 항강구국과 해초비빔밥을, 전주에서 콩나물국밥과 굴전을, 거제도에서 볼락 김장김치 보쌈을 먹는 호사를 누린다.

 

"버들치 시인이 맛을 보라면서 내민 숟갈을 받아먹은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체 이 향기는 무엇이란 말인지. 아아, 품위 있게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칼칼하고 구수한 국물이 마음마저 위로하고 있었다. 따뜻한 국 한 그릇, 수프 한 그릇은 원래 영혼을 달래주기도 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p.258~p.259)

 

수필을 일러 자기 고백적이며 작자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이라고들 한다지만 글쓴이가 자신이 되는 까닭에 글은 어느 정도 왜곡되거나 미화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이 마다한 산문집을 공지영 작가 본인이 대신 나서 시인의 음식 이야기를 기록했으니 이 책은 어지간히 객관성을 띠는 글이라 말할 수 있을 터, 나 또한 시인의 소박한 밥상머리에 수저 한 벌 얹고는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 일행을 둘러보았다. 내게 이 책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인생의 어떤 일에서든 똑같겠지만, 그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첫번째에 꼽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나는 너무도 소중한 이들을 얻은 것이다." (p.319)

 

시인의 소박한 밥상을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때 이른 허기를 느끼게 하는 까닭은 아마 따로 있지 싶다. 계절도 잊은 채 도시의 너른 길을 뱅뱅 맴을 도는 우리가 실상 잊고 지냈던 것은 마음의 허기가 아니었을까. 정에 목마른 우리는 육체의 배고픔이 채워져도 언제나 허기가 졌던 것이다. 세상의 욕심이란 욕심은 다 물리고 정만 슴벅슴벅 베어 넣은 음식이니 작가도 나도 시인의 밥상을 보며 허기를 느낄 수밖에. 한 해가 저무는 이 즈음, 사흘여 추웠으니 오늘부터 대략 나흘쯤 따뜻하기를 기원해 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처럼 그렇게 우리 모두의 따뜻한 인정으로 새해에는 부디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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