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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이란 결국 나와 시간과의 한판 승부, 피할 수 없는 달리기 경주가 아니겠는가. 한때는 나도 흐르는 시간을 저만치 앞질러가서 느려터진 시간을 멀뚱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 다음주의 숙제를 미리미리 해놓는다거나 몇 년 뒤에나 있음직한 일도 잰걸음으로 미리 대비하여 짬이 날 때마다 하나하나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간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시간과 보조를 맞출 수 있었고 이제는 숫제 시간을 저만치 앞세우고 기신기신 쫓아가는 것도 힘에 겹기만 하다. 하여 이제 나는 이미 과거가 돼버린 시간의 흔적들을 더듬는 게 내 삶의 전부인 양 느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구나 싶다.
최근의 국내 정세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인 양 보인다. 그럴수록 내 기억은 과거로 뒷걸음질을 친다. 1990년 1월, 3당 합당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국회의장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치던 그 모습, 전국에 생중계된 평검사들과의 토론 자리에서 "이쯤 가면 막하자는 거지요?"라고 묻던 신임 대통령의 모습, 외손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마을 들녘을 달리시던 퇴임 후의 모습 등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직 대통령의 무능 때문이거나 그로 인한 국민들의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이다.
"두 대통령 모두 사상가적인 면모를 지녔다. 문화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했다. 독서와 사색,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이를 통해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키웠다. 그리고 그것을 말과 글로 표현할 줄 알았다. 두 분 다 연설문에 공을 많이 들였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p.288)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비서관을 했다는 저자는 8년간 두 전직 대통령에게서 직접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이 책 <대통령의 글쓰기>에 싣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글쓰기 책이라기보다는 연설문과 관련된 두 분 대통령에 대한 회고록쯤으로 읽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 가장 선명한 색채로 역사의 한 장을 기록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연설문은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빛나는 것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독서와 글쓰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따라서 독서 없이 글을 잘 쓸 수 없으며, 글을 잘 쓰는 사람치고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그랬다." (p.46)
<대통령의 글쓰기>를 읽었던 나의 소회를 글로 씀에 있어서 글쓰기 방법에 대해 굳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연설문은 SNS에서 우리가 쓰는 글과 다르고 더구나 대통령의 연설문은 우리네 인생에서 제 손으로 쓸 일이 아마도 없지 싶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쓰기와 관련된 좋은 책이 시중에 나와 있는 것만도 좀 많은가 말이다. 현직 대통령 또한 연설문 하나 제 손으로 쓰지 못하여 이 사달이 나고 결국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위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비단 연설문 때문이 아니고 자신의 인생을 거짓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진실된 삶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으니 글이 뭔 필요며, 말이 무슨 필요이겠는가.
"자기 인생에서 길어 올린 자신만의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콘텐츠는 어떻게 만드는가. 나는 인생 경험이 보잘것없는데 어떻게 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독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방법은 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다. 훔치는 방법은 관찰이다. 세심하고 용의주도한 관찰이다." (p.220)
오늘은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민중총궐기가 있는 날이다. 나는 비록 그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인터넷 생중계를 통하여 그 현장을 보며 광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와 울분. 어느 왕조시대에서나 볼 수 있었을 듯한 전횡과 국정농단은 우리나라 남쪽 끝 어느 섬마을의 아주머니조차 분노케 했나 보았다. 전국에서 구름 같이 몰려든 인파와 그 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단상에 올라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촌부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모르긴몰라도 그것은 바로 떳떳하게 살아온 그 사람의 인생에서 기인할 것이다. 용기와 진실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닮아 있게 마련이니까.
"글을 쓰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첫 줄을 쓰는 용기,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 쓴 글을 남에게 내보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술 마시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고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일도 용기가 없으면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용기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양심과 소신을 지키는 용기를 말하려고 한다." (p.242)
저자는 시종일관 두 분 전직 대통령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색,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말하고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잘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고 했던 대통령의 사과 연설은 온 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것이 결국 대통령의 수준이었고, 한 국가를 책임지는 리더로서의 품위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만큼 성숙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글을 잘 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만의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스타일과 콘텐츠로 쓰면 되고,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다." (p.271)
지난 5일 대구 시내에서 열린 어느 집회에서 있었던 한 여고생의 연설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그녀는 단상에 올라 "우리는 꼭두각시 공주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개·돼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여고생은 대통령의 수준을 딱 구중궁궐에 갇힌 '꼭두각시 공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책 <대통령의 글쓰기>는 한 사람의 글쓰기 수준이 결국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수준을 드러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삶의 기록이 삶의 방향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