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튼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증거만을 긁어 모아서 일차적으로는 자신을 먼저 철석같이 믿게 만들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곤 한다. 자신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당초 갖지 않는다. 현실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 모두 감정과 지각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 대신 환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거나, 침체로 빠져드는 익숙한 신경 경로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경향에 대한 대안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기감정과 환상으로 채색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위험과 기회가, 죽음의 확실성뿐 아니라 커다란 행복도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긍정의 배신" 중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쓴 <긍정의 배신>은 우리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한다. 어제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넘어 경악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줄 안다. 나는 그게 그렇게 경악할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일이 전혀 엉뚱한 결과로 우리 앞에 보여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환상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둘 사이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정신적 충격 또한 증가한다. 현실은 우리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순간 눈앞에 보여지는 실제적인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 전체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은 그리 많이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멀리 갈 것까지도 없이 우리도 지난 대선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막연한 환상만으로 지금의 대통령을 뽑지 않았을까 싶다. 경제 민주화에 대한 환상, 복지 증진에 대한 환상, 청년 고용 증진에 대한 환상 등. 엊그제 만났던 어떤 분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바지 사장'은 들어봤어도 '바지 대통령'은 처음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분도 지난 대선에서 지금의 대통령에게 투표했다고 했다. 그분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믿었던 환상이 이토록 무참하게 짓밟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듯했다.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면(이는 내 유토피아의 전제다), 삶은 영원한 축하 무대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무대 위에서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희망하는 것만으로 그런 축복받은 상태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초래했거나 자연 세계에 놓여 있는 무시무시한 장애물과 싸우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적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긍정의 배신" 중에서)
미국 국민의 반 이상이 어쩌면 집단적 환상에 빠져 미치광이 트럼프에게 투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환상이 지금으로서는 마치 당연한 현실처럼 믿어진다는 점이다. 가까운 미래에도 그 환상이 깨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 환상에 더욱 강력한 믿음을 더할지도 모른다. 유태인과 이스라엘의 시녀로 복종했던 지난 날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는지도 모르지만... 오후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린다. 사방이 금세 어두워졌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