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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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별도 없이 성급하게 왔던 계절이 또 서둘러 떠나려 하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아쉬움만 가득 남겨 놓은 채 말이다. 아쉬움은 늘 준비되지 않은 게으른 자의 몫으로만 남는다. 아파트 주변을 붉게 물들였던 벚나무잎은 그제 내린 비가 힘에 겨웠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흩날렸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옛말도 있다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잔뜩 옹송그린 자세로 잰걸음을 옮기고 있다.

 

바람으로 가늠하던 가을의 결이 어느새 칼날처럼 매서워졌다. 시간의 흐름을 가을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계절도 없는 듯하다. 서서히 단풍이 드는 나뭇잎에서, 날카로워지는 바람결에서,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듯 보도 위를 힘없이 뒹구는 낙엽의 무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온몸으로 느끼지 않던가. 당나라의 명필가 구양순이 쓴 '추성부'(秋聲賦)에는 이런 소절이 있다. '바람의 결은 외로움에서 그리움의 톤으로 돌아눕고 그 기척을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건 귀뚜라미와 잠자리. 귀뚜라미는 더듬이로, 잠자리는 대나무의 속청 같은 날개로 그 그리움의 감도를 때론 진하게 때론 옅게 조율한다.' 얼마나 멋진 문장인지...

 

앉아만 있어도 괜히 감상적으로 변하는 건 계절의 탓도 있으려니와 며칠 전에 읽었던 <숨결이 바람될 때>가 생각나서이기도 했다.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아내를 남겨둔 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의 회고록인 이 책은 가을의 속절없는 애상처럼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 나는 내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p.193)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 폴은 레지던트 마지막 해에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치료 후 기적적으로 복귀하여 얼마 남지 않았던 7년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지만 결국 그는 죽었다. 신경외과 전문의도, 추앙받는 교수도, 유능한 과학자도 그는 되지 못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22개월 만에 그는 세상과 이별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고자 고군분투했던 그의 노력은 이 한 권의 책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p.105)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폴과 그의 아내 루시는 인공수정을 통하여 임신을 했다.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대신 남겨진 삶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리라 결심한 것이다. 보조침대에 누워 루시의 출산과정을 지켜보고 갓 태어난 딸을 힘겹게 안아보았던 폴은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듯하다. 그가 연명치료를 거부한 채 죽음을 선택하던 날 그의 딸은 태어난 지 겨우 8개월이 된 아기였다. 아빠로서, 한 생명의 보호자로서 그는 얼마나 할 말이 많앗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아쉬움 속에 눈을 감았을까. 그가 어린 딸에게 남긴 메시지를 옮겨본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p.234)

 

화학요법으로 쇠약해져가는 몸과 가물거리는 의식을 부여잡고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에는 22개월은 결코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미완성의 작품일 수도 있다. 이 책의 말미에서 그의 아내 루시도 말하고 있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루시는 폴이 암과 사투를 벌이던 그 기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비록 지난 몇 년은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때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충만한 시기이기도 했다. 매일 삶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의 균형을 힘겹게 맞추며, 감사와 사랑의 새로운 깊이를 탐구한 시기였다." (p.256~p.257)

 

폴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내 루시는 매순간 그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고백한다. 모든 사람이 거쳐가야 할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죽음을 예약하기 전에는 그 사실을 체감하지 못한다. '바람의 결이 외로움에서 그리움의 톤으로 돌아눕는' 이 계절이 오면 나 또한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물드는 단풍잎새에도, 마른 바람결에도, 푸르게 높이를 더하는 하늘가에도 내 슬픔의 물기가 촉촉히 젖어드는 것만 같다. 사랑을 하는 것도,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것도 어쩌면 내가 떠난 후에 그리움의 무게를 더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결국 한 사람이 살다 간 삶의 가치는 그리움의 무게에 지나지 않음이다. 날이 차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깊어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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