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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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비가 잠깐 내렸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수준의 짧고 가벼운 비였다. 어찌나 짧게 내렸던지 업무에 집중했던 사람이라면 '비가 내렸었어?' 하고 의외라는 듯 되물을 수도 있는 그런 비였다. 비는 그렇게 잠깐 내리는 듯하더니 금세 그쳤을 뿐만 아니라 계절마저 성큼 옮겨 놓은 듯했다. 마술을 부리듯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가을을 만들어 낸 것처럼 말이다. 바깥 날씨가 시원하다고 느꼈던 게 얼마만인지... 실내의 에어컨 바람 밑에서는 오슬오슬 추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서 나올 때 카디건이라도 하나 가져올걸 그랬나?' 하는 후회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여름 휴가가 끝나면 나는 대개 하릴없이 여행서적을 뒤적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랴곤 한다. 어떤 거창한 휴가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다시 휴가를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름 휴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이맘때쯤 서점에 나가 보면 여행 서적 코너는 사람들로 늘 북적이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아직 휴가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적잖이 섞여 있겠지만. 휴가철 여행서적 수요를 노리고 각 출판사마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여행서적을 출간하는 것도 아닐 텐데 해마다 여름이면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 사람들이 여행서적 코너를 들르곤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에서는 문득 '이참에 열 일 제쳐두고 여행이나 가버릴까?' 하는 유혹이 불현듯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도 그동안 어지간히 많은 여행서적을 읽어왔다. 시중에 나온 여행서적 중 안 읽은 책을 고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 중 열에 아홉은 읽었다는 기억마저 희미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책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내게 여행서적은 아마도 시간 때우기 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읽은 책 중에서 여행서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먼 북소리>이다. 그 외에도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나 유성용의 <생활여행자>, 또는 후지와라 신야가 쓴 <인도방랑>이나 박준의 <On the Road: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등 몇 권의 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가 나왔다기에 서둘러 구입을 하고는 이제껏 책꽂이에 방치했다가 어제 겨우 읽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루키의 광팬임을 자처하는 나는 일단 그의 책을 손에 잡으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책을 읽다 말고 중간에 내팽개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는데 이 책은 달랐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루키 스타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여느 여행작가가 자신이 방문한 여행지를 소개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글이 이어질 때는 '이거 하루키 책 맞아?' 하면서 다시 한번 저자를 확인하곤 했었다.

 

"생각건대, 풍족한 물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행위란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가 아닐까. 하긴 '인간에게'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 가만히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오랫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을 때 느끼는 감정과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바닷가 근처라는 사실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p.13)

 

책을 구입하고 대충 넘겨봤을 때는 그런 줄 알았다. 어떤 기획 형식으로 여행지 한 곳을 정하여 그곳을 방문하고 작가가 그곳에서 느꼈던 느낌과 함께 관광명소를 자세히 소개하는 그런 책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글에서는 사색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짙게 배어났다. 게다가 <먼 북소리>에 등장했던 그리스의 두 섬(미코노스 섬과 스페체스 섬)을 다시 방문하여 잠시 동안 그가 살았던 집과 마을을 둘러보고 그 느낌을 적은 '그리운 두 섬에서'를 읽을 때에는 마치 내가 작가가 된 양 아련한 추억에 젖기도 했다.

 

"오랫동안 목조 어선을 만들어온 작은 조선소에서 탕탕 나무망치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정겨운 소리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는 갑자기 뚝 끊겼다가, 잠시 후 다시 들려온다. 이런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나무망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이 이십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을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 노르웨이의 숲』집필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삼십대 중반의 작가였다." (p.109)

 

이 외에도 책에는 이십여 년간 작가가 방문했던 세계 여러 곳에 대해 쓰고 잡지에 실었던 글이 다수 등장한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라오스 루앙프라방, 와인의 성지 토스카나, 미식가들의 천국 포틀랜드, 시벨리우스의 나라 핀란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갔으면 싶은 뉴욕의 재즈 클럽, 작가회의 차 들렀던 아이슬란드, 추억이 깃든 보스턴, 일본 근대문학의 흔적을 간직한 구마모토까지.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p.181~p.182)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의식하지 않으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작고 순간적인 변화들이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잊혀진다. 나를 감싸고 흘러갔던 시간과 하늘과 구름과 말매미의 울음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낮게 가라앉았던 침묵과 그러한 것들로 시시각각 다른 색깔로 변했던 나의 감정과... 이렇듯 하루는 많은 것들로 채워지고 또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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