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가 내게 묻다 - 당신의 삶에 명화가 건네는 23가지 물음표
최혜진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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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바쁘다는 푸념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나도 저렇게 푸념 좀 해봤으면...' 한없이 부러운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을 하던 당신은 내심으로는 은근히 뻐기거나 으쓱해지는 감정이 들지는 않았나요? 또는 '나도 너처럼 한가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당신의 말 속에 나는 적어도 너보다는 쓸모가 많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슬몃 찔러 넣었던 적은 없었는지요. 우리는 유능함의 기준이 바쁨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대놓고 자랑질을 하기가 뭐해서 겸손한 척 자랑을 했던 거라면 그건 정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최혜진의 <명화가 내게 묻다>를 읽는데 그런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 그런 척 위장을 하고 유치찬란한 자신의 허세를 감추기 위해 쉬운 상대를 골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그 시절 나는 일을 많이 해내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다른 직원보다 업무량이 많은 것, 업무 시간이 긴 것, 남들이라면 손을 내저으며 이 시간 내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할 일을 맡아서 초인적으로 처리해낼 때 자부심을 느꼈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능력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시간을 쥐어짜듯 살면서도 커리어우먼의 삶은 다 그렇겠거니 했다." (p.151)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앞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진이 아닌 그림에 탐닉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는 피사체의 겉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나 감정을 화폭에 담으려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는 규정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림에서 찾아내고 제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렘브란트의 역할극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자아라는 것도 조금씩 발견하고 개척해나가는 신대륙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기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낯설고 새로운 상황과 처지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란 생각도. 빈곤에 처했을 때의 나, 승승장구하며 성취감을 누릴 때의 나, 을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갑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 그 많은 내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이 결국 자아 성찰 아닐까." (p.70)

 

잡지사 제이콘텐트리 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는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여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갔고 어느덧 미술관 여행 10년 차가 되었다는 그녀는 미술관에서 그녀가 얻고 싶은 것이 '교양'이 아니라 '관계'이고, 하고 싶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난해한 미술사나 현학적인 미술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림에서 발견한 '나'라든가, '일'이라든가, '관계'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나는 비록 그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일자 무식꾼이기는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마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요. 흐트러짐 없는 선을 긋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한 장의 그림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친구들에게도 '그림은 언어가 없는 한 편의 '시'이거나 삶의 '은유''라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피사체 너머의 어떤 세계를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작가가 좋아한다는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상의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그림에서 발견하곤 하지요. 최혜진 작가처럼 말입니다.

"일상 공간을 고요하게 가로지르는 햇빛, 그로부터 퍼지는 신비로운 기운, 정적에 잠긴 인물, 이런 몽환적인 표현 덕분에 분명 닳고 닳은 일상임에도 뭔가 낯설고 특별한 느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일 이면에 숭고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p.343~p.344)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발견이자,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술을 이해한다는 건 그런 것이겠지요. 반복되는 일상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어쩔 수 없는 권태를 새로움으로 치장하여 매일매일을 처음인 양 살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내 눈에는 참으로 숭고하게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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