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가지고 싶은 문장들 - 책 숲에서 건져 올린 한 줄의 힘
신정일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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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할 때면 종종 찾는 도서관이 있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몇 년을 다니다 보니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며, 나와 같은 도서관 이용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안면이 익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하는 내게 인사만 나누고 그냥 헤어지기에는 뭔가 섭섭하다는 듯 차라도 한 잔 같이 하자며 휴게실로 이끄는 분들이 더러 있다. 개중에는 직장을 은퇴하고 소일 삼아 책을 읽는 분들도 있고, 은퇴를 대비하여 자격증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고, 단순히 책이 좋아서 무작정 드나드는 나와 같은 부류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분들과 가벼운 한담을 나누다 보면 으레 아이들의 교육 문제나 경제 상황이나 아주 가끔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하게 된다.

 

그렇게 안면을 익힌 사람들 중에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열혈 독서인 한 분이 있다. 평생을 농협에서 근무했다는 그 분은 슬하에 일남일녀를 두고 있는데 지금은 다 출가하여 나가 살고 도서관 인근의 아파트에는 노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단출한 살림을 살고 있다고 했다. 농협을 은퇴하기 전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한때는 사무실까지 개업했었지만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듯하여 지금은 완전히 손을 뗀 상태라고도 했다. 막상 일에서 손을 놓으니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다른 노인들처럼 하는 일도 없이 공원을 배회하거나 아파트 노인정에 나가 시간만 축내는 게 싫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서관에 나온다고 했다. 오전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바둑을 두거나 테니스를 치고, 일주일에 한 번 동사무소 요리 아카데미에도 나가신다고 했다. 빡빡한 스케줄이었다.

 

며칠 전에도 도서관 열람실에서 우연히 그분을 만났다. 열람실의 책상에는 요즘 읽고 있는 책과 마음에 드는 문장을 기록하는 노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을 기록한 노트만 해도 열 권이 넘는다고 했다. 은행에 다니는 아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의 노트를 읽어보라고 권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기도 했다.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인 신정일의 신작 <그토록 가지고 싶은 문장들>을 읽는 내내 그분 생각을 했다.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또는 깊이 공감하는 한 문장을 기록하는 일은 일견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에게 깊은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었던 문장을 언제고 다시 읽으면서 오늘과 같은 울림을 다시 경험하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기록한 문장을 읽고 내가 느꼈던 전율을 그들도 똑같이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일은 얼마나 성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감동은 단지 기록하는 사람에게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이란 본디 앞뒤 맥락을 통하여 이해되게 마련이고, 전후의 사정에 의해 감동의 깊이도 달라지게 마련인지라 자신의 감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단 하나의 문장만 추려낸다면 그것은 다만 생명이 없는 나뭇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명력을 상실한 문장을 읽고 감동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강하게 살아남으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살을 꿈꾸었다가 이 구절을 생각하며 견디어냈습니다. 또 몸과 마음이 나태해지고 세상과 타협하고 싶을 때 섬광처럼 나타나 나 자신을 호되게 질타한 구절도 많습니다. 이러한 말과 글이 나를 살아 있게 했습니다."   (p.5)

 

저자는 자신이 읽고 감동했던 여러 명저의 문장들을 발췌하여 이 책에 담았다. 도서관에서 내가 만난 그분도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을 산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자신은 비록 수없이 많이 쓰러지고 좌절하였으며 그때마다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고 그 속에서 발견한 문장들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지만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 자신의 후손들은 이 책 또는 자신이 기록한 한 권의 노트를 통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손쉽게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와 같은 범부는 앞뒤 맥락,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서는 감동도, 깨달음도, 심지어 책을 읽는 재미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저자의 노력과 간절한 바람에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 뿐이다.

 

천재가 아닌 이상 타인이 기록한 짧은 문장을 읽고 그 속에 내재된 여러 의미와 깊은 깨달음을 단박에 알아채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책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책에서 발췌된 짧은 문장을 읽을 때는 적어도 책을 읽는 수고와 노력에 버금가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책을 읽고 이해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문장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지혜는 하루 아침에 오는 게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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