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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선물용 특별판) -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ㅣ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1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루시드 폴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5월은 역시 장미의 계절이다. 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하기 이를 데 없어서 봄꽃이 막 시작될 무렵의 산수유나 벚꽃에는 무한애정을 보내다가도 화려하게 치장한 봄꽃들이
지천에 흐드러지면 왠지 모르게 시큰둥해지고 여름을 향해 치닫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도 길가에 핀 조팝나무의 알싸한 향기도 도통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눈과 코가 호사를 누리고는 있지만 정작 배가 불러서인지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낸다. 아침에 볼일이 있어 잠시 외출을 했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싶어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옮겼더니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조팝나무꽃이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꽃의 향기에 한참이나 취해 있었음에도 그 향기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알싸하다'는 표현은 식상하고 '익숙한 향기'라고 하면 조팝나무꽃 향기를 처음 맡아보는 사람에게는 막막하고...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가
쓴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는 제목만큼이나 예쁜 책이다. 조팝나무의 꽃향기를 적당한 언어로 표현할 길 없어 막막하기만 했던 나처럼 세상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그런 순간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특별한 낱말들을 가려 뽑고 저자 자신이 직접 그린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함께 배치한 귀여운 책이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특별한 감정, 누군가에게 전하고픈 벅차오르는
느낌을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는 세계 각국의 언어에서 52개의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낱말을 선별하여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그 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낱말을 그림과 함께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것이 화제가 되어 책으로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루시드폴의 번역이 이채롭다. 이 책에 우리나라 말은 '눈치'가 실렸다.
"때때로 상대방의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불안한지 화가 났는지 다정한지 슬퍼하는지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한 사람을
오래 겪다 보면 미묘한 차이까지도 알아챌 수 있겠지요.
책에는 '눈치'(NUNCHI)의 의미에
대해 파도의 골과 마루인 듯한 그림 위에 '눈에 뜨지 않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미묘한 기술'이라고 쓰고 있다. 이 외에도
노르웨이어, 네덜란드어, 웨일스어, 그리스어, 인도네시아어, 힌디어, 툴루어, 이디시어,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이누이트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일본어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나라의 언어 중에서 특별한 낱말을 가려 뽑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일본어 낱말이 네 개나 실렸다는 점이다.
'츤도쿠'(TSUNDOKU)-사다 놓은 책을 펼치지도 않은 채 내버려 두기, '와비-사비'(WABI-SABI)-생사의 윤회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 '보케토'(BOKETO)-무념무상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코모레비'(KOMOREBI)-나뭇잎 사이로 스며 내리는
햇살, 이 그것인데 책을 읽다가 문득 '보케토'가 우리나라의 '멍 때리기'와 같은 뜻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낱말 중에는
야간(Yaghan)어인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가 있었다. 칠레 남부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의 야간족 원주민이 쓰는
말이다. 책에서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 '같은 것을 원하고 생각하는(그러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 인정과
이해'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서로에게 꼭 필요하지만 자신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 상대방이 먼저 자원하여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인 것이다. 게임이론 중 '자원봉사자의 딜레마'와 관련된 말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기네스북에는 특이하게도 '가장 간단명료한(succint)단어'로 이 단어가 등재돼 있다.
클레멘스 베르거라는 오스트리아 극작가는
이 단어를 두고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했다는데 어떻게 '간단명료한 단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한 낱말로 요약했으니 간단명료한 단어가 맞긴 맞는 듯하다. 요즘의 새누리당 사정이
'마밀라피나타파이'적 상황이 아닐까 싶다.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당선된 사람들을 다시 복귀시키자니 꺼림칙하고 안 시키자니 당장의 국회 사정이
녹록치 않고...
연초에 이사를 하고 내내 미뤄두었던
책을 며칠 전에 정리하다 보니 읽지 않고 내버려 둔 책이 어찌나 많던지... 이 책에 실린 일본어 '츤도쿠'가 쌓여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책을 산다.
"단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심각하게 쌓여 있는 책더미일 수도 있는 '츤도쿠'에 대해서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다, 읽지도 않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당신. 그런 당신을
사람들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책 속 주인공들에게 한 번쯤은 햇빛 구경이라도 시켜 줘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