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이 있거나 할 때면 가로질러 통과하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말하자면 그 아파트는 내가 가는 길의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바람에 한가할 때는 에둘러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파트 후문에서 정문까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걷게 된다는 얘기다. 어느 아파트나 그렇지만 그 아파트에도 단지를 구획하는 그리 높지 않은 담장이 빙 둘러쳐져 있고,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비좁은 통로가 후문을 대신하고 있다.

 

후문을 막 통과하여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인적이 없을 듯한 공터가 나오고 그곳에서 직각으로 꺾인 담장은 정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는 그 공터의 담장 귀퉁이를 지나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곳에는 어른의 눈높이쯤 되는 위치에 경고문이 붙어 있고, 오며 가며 그 경고판을 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경고판에는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로 "노상방뇨 금지"라고 대문짝만하게 씌어 있고, 그 밑으로 'CCTV 촬영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거기서 그쳤다면 내 눈에도 띄지 않았겠지만 그닥 웃을 일도 아니었다. 경고 문구 옆에는 커다란 가위 그림이 무엇이든 잡히기만 하면 그대로 잘라버리겠다는 듯 6,70년대의 포스를 자랑하며 결연히 서 있는 까닭에 나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내가 어렸을 때, 가로등도 없는 골목 귀퉁이의 후미진 곳에는 여지없이 소변 냄새가 진동을 했고, 이런 곳엔 대개 집주인이 '소변금지'라는 문구를 삐뚤빼뚤 써 놓거나 커다란 가위를 그리고 그 옆에 '짤러'라는 강력한 경고성 문구를 써 놓기도 했었다. 문구만 읽었을 때는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짤렸다는 사람을 풍문으로라도 들어본 적 없으니 그 글을 썼던 집주인도 단순히 경고로만 그쳤던 모양이다.

 

윤동주의 시 '사랑스런 추억'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트리고,/담배를 피웠다.// …(중략) …봄은 다 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경고판 위에 그려진 검은 가위가 꼭 배트맨의 가면처럼 정답기만 하고 나는 그 경고판을 보면서 어렸을 적 동네 담벼락이나 나무 전봇대에 그려졌던 옛 시절의 추억 한 컷을 떠올리게 된다. 그나저나 CCTV로 촬영을 하고 있다는데 소변을 보는 간 큰 사람이 있기나 한 건지, 그리고 소변을 보다 짤렸다는 소식은 언제쯤 듣게 될런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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