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안도핀 쥘리앙 지음, 이세진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가뭇없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근 이십 년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와 나 사이에 낯선 시간들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렸고 명절 후유증인 양 나른한 피곤이 몰려왔다. 어쩌면 우리는 길 위에서 정면으로 마주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마치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사람들처럼. 서로가 알지 못하는 저간의 사정을 최대한 간추려서 서로에게 들려주려 애쓰는 너와 나의 해명은 힘겨웠다. 그 잠시의 해명만으로 그와 닿지 못했던 낯선 시간들이  친숙했던 시간으로 쉽게 전환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고 몸도 마음도 그에 따라 한없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하루에 반나절쯤, 아니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다만 두어 시간만이라도 귀를 막고, 눈도 감고, 전화며 텔레비전이며 내게 세상 밖의 소식을 전해주는 모든 도구를 내려놓은 채 죽은 듯이 있고 싶을 때가 있다. 까짓거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하는 미련이 애당초 먹었던 마음을 슬몃 밀어내곤 하는 까닭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것이다. 외로움도 습관이다. 정말로 외로움에 익숙해지면 나는 그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는, 죽음과 같은 삶을 살게 될런지도 모른다. 삶의 테두리 밖에서 그들을 멀뚱히 지켜보면서 말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삶으로부터 스스로 달아나거나 삶의 테두리에서 단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현재의 삶이 중요할 뿐이다. 지금의 햇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지켜주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미래의 불안 때문에 현재를 걱정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다. 안도핀 쥘리앙이 쓴 <젖은 모래 위의 두 발>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의 전화를 받았고, 한 번 만나자는 상투적인 인사로 쓸쓸한 기분을 달랬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삶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3년 9개월. 오늘로써 타이스는 딱 3년하고 9개월을 살았다. 아직은 어린아이, 월령까지 따지는 것이 당연한 어린아이다. 지난 한 해는 너무나 밀도 높고 강도 높게 보냈기 때문에 두 해로 쳐줘야 할 것 같다. 타이스는 곧 네 살이 된다. 석 달만 있으면. 아니, 석 달이나 있어야! 타이스가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네 번째 생일이, 다가갈수록 더 멀게만 보이는 사막의 신기루 같다." (p.231)

 

짐작하겠지만 이 책은 유쾌하거나 읽어서 기분이 좋아질 만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먹먹해지는 책이다.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 나는 그런 질병이 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백과사전의 정의로는 '매우 희귀한 소아의 백질 대사의 질환 중에서 대표적 질환이며, arysulfatase A의 감소에 의해 초래되는 상염색체 열성 유전 질환'이라고 한다. 도무지 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병은 발병 연령과 효소 결핍의 종류에 따라 영아 후기형(late infantile), 연소형, 성인형 이염성 백질이영양증 등으로 나뉜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책의 주인공인 타이스는 1~2세경에 발병하는 영아 후기형 이염성 백질이영양증이었다. 마땅한 치료법은 없다.

 

파리의 한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저자는 2006년 그녀의 둘째 아이 타이스의 두 돌 즈음에 아이가 이 유전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다. 아이는 겨우 두 살, 남은 삶은 1년 남짓이었다. 삶의 부조리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나이였다. 타이스가 진단을 받을 당시 그녀는 이미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한 명 더 있었고, 유치원에 다니는 타이스의 오빠 가스파르가 있었다. 새로 태어날 아기도 유전될 확률이 25퍼센트나 되었으며 막내딸 아질리스도 결국 같은 병임을 확인받게 된다. 신경계가 서서히 마비되어 결국에는 생명 기능을 멈추게 하는 이 병은 일단 발병하면 골수 이식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아질리스는 여러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골수 이식을 받았다.

 

나는 이따금 이런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가족 중 누군가가 심하게 아프다면 그게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철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아프지 않았다면 일 년에 두어 번 명절에만 이따금 만났을 사람들도 그보다는 더 자주 만나게 되고 환자를 중심으로 연민의 끈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나는 여러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환자를 통해 가족이라는 느낌을 더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다른 가족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베푸는 사랑의 체험이 아닐까 싶다.

 

"타이스의 울음소리만큼 정신을 확 깨우는 알람은 없다. 당번을 서는 사람은 낑 하는 소리 한 번만 나도 다른 식구들이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부리나케 타이스에게 달려간다. 안됐지만 그런 바람은 소용없다. 부모의 본능인지,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다가도 애가 부르는 소리는 알아듣는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타이스를 잘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아니까 금방 다시 잠들 수 있다." (p.98)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유행가 가사가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산울림의 "청춘"을 듣고 그 절절한 가사와 멜로디에 깊이 빠져든 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듣는 관객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비슷한 거니까. "생에 살아갈 날을 더할 수 없다면 살아갈 날에 생을 더해야 한다."고 했던 암 의학자 장 베르나르의 말이 가슴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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