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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월이 갈수록 뒷전으로
뒷전으로 계속해서 밀려나는 게 있다. 그리움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의 흔적들, 유년시절의 추억과 얼굴이 붉어질 만큼 어이없었던
실수들, 순박하거나 촌스러웠을 얼굴들... 그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의 이미지로 가슴에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수백 번도 더 떠올렸을 그런
것들이 '그리움'의 목록으로 가슴을 빼곡하게 메우는 날이면 '다 무슨 소용이람' 하면서 애써 외면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그렇게 소용'있는' 것들과 소용'없는' 것들로 애써 편을 나누고 소용'없는' 편에 떠올랐던 그리움의 뭉텅이들을 하나 남김없이 지워버리곤
한다.
"어느덧 박 선생님의 목소리는 정원을 떠난 듯하였다. 또다시 홀로 남았는가 하여 목줄기가 먹먹해오려
했으나 고개를 내저어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더 이상 그분의 소중한 기억을 눈물로 소진하지 않으리. 그리움아 그리움아, 나에게 힘을 다오. 박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내 안에서 꿈틀꿈틀 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그리움은 순식간에 내 안을 가득
메우고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아 좁은 내 몸뚱이 안에서 사납게 뒤채며 나갈 곳을 찾더니, 마침내 나의 땀구멍 하나하나마다 황금빛 깃털이 되어
쏟아져나왔다." (p.303)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애써 밀쳐두었던 유년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살아나게 한다. 의식의 저편에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날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급기야는 눈물 한 방울 찔끔 흐를 것처럼 감정이 고조된다.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나면 가슴에는 왜
아릿한 슬픔이 남는 걸까? 결말이 비극적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음의 한편을 슴벅슴벅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찌르르 전신을 휘감아 돌고 나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그리움만 가슴에 남는다.
소설은 인왕산 자락의 달동네를 무대로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있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얼핏 주인공인 한동구의 유년
시절을 다룬 성장소설인 듯 읽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한동구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대한민국의 성장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한동구가 아닌 대한민국의 성장소설인 셈이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고 시대의
아픔은 고스란히 그 시대를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었다.
소설은 동구의 어머니가 동생 영주를 출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3대 독자인 동구의 아버지와 동구가 태어난 후 6년이나 아이가 없었던 탓에
동구의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태어날 아기가 아들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바램과는 달리 딸이 태어났고 고부간의 갈등은 점점 격화된다. 음식
솜씨가 좋고 씩싹했던 동구의 어머니는 늦둥이 영주의 돌을 맞아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줄 요량으로 떡쌀을 넉넉히 준비하지만 이를 본 동구의
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낸다. 동구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어머니의 편을 들게 되고 그로 인해 부부 사이도 멀어진다.
3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을 읽지 못했던 동구와는 달리 영주는 제 스스로 한글을 깨쳣는가 하면 할머니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반면 동구는 점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데 어느 날 동구의 담임이었던 박영은 선생님을 통하여 동구가 난독증을 앓고
있음을 가족 모두가 알게 된다. 마땅히 기댈 데가 없었던 어머니는 선생님께 동구를 부탁하였고 그 바람에 동구는 하루에 한 시간씩 선생님과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된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왔던 선생님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던 동구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족간의
불화와 자신의 속내를 선생님께 털어놓는다. 마냥 행복했던 동구의 3학년이 그렇게 흘러간다.
동구는 이제 한글을 제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어눌하게 읽을 수는 있게 되었고, 담임 선생님의 편지를 가족들에게 읽어줌으로써 자신이 나아지고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 박영은 선생님은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고, 동구의 담임은 학생들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고 이상한 짓만
일삼는다. 게다가 동구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의 담임이 박영은 선생님을 마음에 두는 바람에 자신을 앞세워 박영은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학업 상담을 핑계로 말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동구는 같은 동네의 주리 삼촌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하게 된다. 고시 공부를 하는 주리 삼촌은 동네에서 덩치가 크고 똑똑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주리 삼촌은 동구의 담임을 만나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다짐을 받음으로써 동구의 고민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영은 선생님과도 인사를 하게 된다.
세상이 어수선하던 1980년의 어느 날 박영은 선생님과 주리 삼촌, 삼촌의 후배이자 박 선생님의 선배인 이태석이 만나는 자리에 동구도
합석하게 된다. 장난으로 건넨 술잔을 받아 마신 동구는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사랑 고백을 하게 되고 박 선생님은 동구가 클 때까지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노라 동구를 안심시킨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란 박 선생님은 생일을 맞아 할머니가 계신 광주에 다녀오겠다며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박영은 선생님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주리 삼촌으로부터 듣게 된 동구는 강하게 부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구의 할머니가 같은
동네에 사는 모실 할머니와 여행을 떠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하게 다투신다. 영주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온 동구는 자신의 목에 무등을 태워
동생으로 하여금 그해 처음 열린 감을 만져보도록 하려다가 그대로 넘어지는 바람에 동생 영주가 죽게 된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은 동구 가족의
해묵은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동구 어머니는 '자식 잡아 먹은 년'이라는 할머니의 욕설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기운을 잃은
할머니도 드러 눕는다. 보다 못한 동구는 할머니의 고향 괴산에 내려가 자신과 함께 같이 살자며 할머니를 위로한다.
작가는 이 한 권의 소설을 통하여 그 시대의 상황과 아픔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 가난과 가치관의 혼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현실의
고통을 피해 달아나고 싶어 했던 도시 소시민의 삶을 소년 동구의 눈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이따금 동구가 찾던 '아름다운 정원'은 현실
밖의 세상,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소중히 하고 끔찍이 위했던 것을 잃음으로써 새로운 것을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남아선호의 가치관이 그렇고, 애국심과 반공을 기치로 삼았던 군부독재가 그렇다. 데모는 무작정 나쁜 것이라고 믿었던
동구처럼 그 시절의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다는 건 내가 믿었던 어떤 것을 손에서 놓는 일이다. 그렇게 아끼던 영주를
떠나보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