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문장들 - 뜯어 쓰는 아트북
허윤선 지음 / 루비박스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대학 시절 '봉천동 산 00번지'의 주소로 기억되는 낡은 단독주택 2층에서 국민학교 친구 2명과 함께 자취를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까지는 남부순환로의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였고 우리는 그 길을 매일 걸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당시에 나는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을 준비중에 있었고,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기공소에서 일을 배우는 친구와 과외를 하며 대학을 다니고 있는 다른 친구 한 명이 있었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자마자 나타나는 방이 우리가 살던 방이었고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주인집 할아버지가 혼자 사용하는 큰방과 그 방에 딸린 부엌이 있었다. 우리 방에는 따로 마련된 부엌이 없었으므로 출출하여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요량이면 언제나 등산용 버너에 불을 붙여 그 위에 물을 가득 담은 양은냄비를 올려 라면을 끓이곤 했었다. 라면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치과기공소에 다니던 친구는 이따금 낡은 기타 반주에 맞춰 유행가 한 곡조를 구성지게 부르곤 하였다. 그때 우리는 너무나 가난했고, 젊음이라는 낭만의 옷자락으로도 다 감출 수 없었던 가난의 추레함이 언뜻언뜻 남들 눈에 띄곤 했었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 방면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나는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기타 코드를 옮겨 잡던 친구의 연주 실력에 늘 감탄하곤 했었다. 낮에는 캔제품 대리점에서 배달을 하고 밤에는 과외를 하느라 늘 바빴던 나는 다람쥐 쳇바퀴의 일상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그때마다 친구가 불러주던 유행가 한 자락은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하여 나는 밤이 늦어서야 퇴근하는 친구의 귀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 일쑤였고, 가끔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만취하여 돌아온 친구에게 노래 한 곡을 청할라치면 그는 차마 싫다고 뿌리치지 못하고 가사마저 뒤죽박죽인 노래를 목소리를 죽여가며 조용조용 들려주곤 하였다.

 

버스를 타면 지척이었던 신림동에 부모님과 여동생이 살고 있었음에도 굳이 집을 뛰쳐 나와 월세와 생활비를 부담하며 그 방에서 같이 살기를 청했을 때 친구들은 누구 하나 내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것은 나로 인해 월세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 것에 대한 경제적 이득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은 친구들도 익히 아는 바였고, 그것은 젊은 혈기의 내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도록 하는 지뢰와 같은 것이었다. 코딱지만 한 작은 방에 장정 셋이 잠을 잔다는 게 영 마뜩치 않았을 텐데 친구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내가 과외비를 받고 술과 안주를 사서 들어갔던 날, 나는 저간의 사정을 겨우 말하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그때였었나 보다. 치과기공소에 다니던 친구는 내게 속에 있는 울분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도대체 어떤 감정이든 누를 수 없을 만치 솟아나면 그때마다 글을 쓰는 게 어떠냐며 노트 한 권을 내밀었었다.

 

나는 도무지 운율에도 맞지 않는 시를, 도대체 시인지 산문인지 형식도 없는 글을 그가 준 노트에 옮겨 적었고, 이따금 친구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 올려진 그 노트를 자신이 봐도 되느냐 내게 묻곤 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비루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친한 친구에게 보이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노트를 들고 외출하지 않는 한 그것은 결국 언제까지고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될 수는 없을 터, 나는 그래도 좋다 승낙하고 말았다.

 

장마가 시작되던 어느 여름날이었나 보다. 친구는 내가 쓴 시에 리듬과 곡조를 붙여 자신의 낡은 기타 반주에 맞춰 흥얼거리고 있었다. 때로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낙서하듯 끄적거리기도 하면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더니 내게 들어보라며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 그때의 느낌이란...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시를 쓸 때 나의 감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내 시를 읽고 느꼈던 친구의 감정이 그대로 밴 것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윤선 작가의 <그림과 문장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그 시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장르가 다른 두 분야의 예술 작품이 만나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 되었을 때의 벅찬 감동은 그 시절에 내가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림을 볼 때면 책이 떠올랐다. 그림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책들, 인생의 비밀을 속삭여주던 말들. 가장 외로운 순간 기댈 수 있었던 행간들. 이 책은 그림 앞에서 떠올린 문장이다. 나는 다만 그림의 말을 들었고, 책으로 답했을 뿐이다. 내가 사랑한 모든 책들이, 대신 답을 해주었다. 100점의 그림과 100점의 문장들.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은 아이들의 흥겨운 모습에선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이 떠올랐고, 붉게, 아주 붉게 타오르는 꽃 그림에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고백이, 수줍은 연인들의 모습 뒤에는 몇 번이나 의미를 고민했던 보토 슈트라우스의 문장이 들렸다." (p.4 ~ p.5)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학창시절의 시화전에서 보았던 친구의 시와 그림, 교과서에 실린 어느 시인의 시에 곡조를 붙여 불렀던 노래, 산에서 구한 나뭇등걸에 인두로 새긴 한 구절의 경구, 그 어느 것 하나 감동으로 되살아나지 않았을까. 예술은 결국 당신의 삶 속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문이다. 그것이 과거로 향하든 미래로 향하든 시간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그 길은 예술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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