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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을 살면서 외부에 믿을 만한 방패막이 하나 두르지 못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곧 외부의 숱한 유혹이나 불의의 것들,
예컨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도 남을 만한 수많은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과 보살핌이 그런 역할을 할 테지만 나이가 들어 부모의 품을 떠날 때쯤 되면 세상살이의 간단없는 괴로움을 방패막이 하나 없이 오직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막아야 할 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극복했던 시련이 단단한 굳은살이 되어 어지간한 고통쯤은 고통으로도
느껴지지 않게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늘 새로운 것이고 보면 인간은 고통 앞에 내던져진 참으로 서글픈 존재인 것이다.
"물론 많이는 섭섭하고 더욱 많이는 그이의 떠남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삶이란 어차피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일의 되풀이가 아니던가. 나는 허퉁함과 또 그이의 새로운 길찾기에 대한 격려가 범벅이 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이의 미용실이 여전히
'행복'이란 이름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p.234~p.235)
매년 이맘때쯤이면 왠지 모르게 사람의 한살이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경험으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고집스런 애착과 낯설고 서먹한 것에
대한 야멸찬 거부가 수박을 쪼개듯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경험이란 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순서가 되면 받아 쥐는 번호표가 아니어서 언제 어느
때 내게 일어날지 가늠할 수 없는 법, 희비에 대한 대비는 언제나 한발 늦게 마련이고 그 간발의 차이가 제 운명을 가를 수도 있음을 수없이 보고 또
느껴도 삶은 한 치의 익숙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산자락에 낙엽이 한숨처럼 흥건하고,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드센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고, 저녁의
퇴근길에 만나는 군밤장수의 주홍 연탄불들, 그리고 문득 겨울이 온다. 머뭇거릴 새도 없이 그렇게 겨울이 오고 한 해가 간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들과 이 어김없는 과정, 그럼에도 연말은 느닷없이 닥치는 보고처럼 늘 착잡하다." (p.238)
양귀자의 인물소설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은 언제 읽어도 그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도무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가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고, 사람도 겪어 볼 만큼 겪어보았다 생각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면서도 과거의 내
경험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듯한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 형식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마치 어느
작가의 산문집처럼 읽힌다. 인물 간의 갈등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법이 없고 다양한 인물에 대한 서술자의 섬세한 관찰과 묘사, 그들에 대한
서술자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던 90년대의 어느 해에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고, 그 후 매년 11월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 나는 이 책을 습관처럼
들춰보게 되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의무인 양. 원미동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던 작가가 서울의 어느 골목 길모퉁이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드러난 모습과 숨겨진 정신'을 짧은 이야기 속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순간순간 달아나고 싶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망에서 나를 온전히 머무르게 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여기 덜 위축당하고, 덜 세뇌당한 사람들 몇이 있다. 그래서 미리미리 우울해 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아도 좋았던 사람들. 아찔한 파격이나 파격한 탈선은 전혀 없이,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꾸려나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김선배, 김밥아주머니, 야채아저씨, 김대호 씨, 박영국 씨, 김박사......" (p.31)
작가 양귀자의 문체는 부드러우면서도 이따금 폭풍이 치듯 몰아칠 때가 있다. 정신이 번쩍 나는 순간이다. 가만히 넋을 놓고 있다가 얼결에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자세를 고쳐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에 베일 듯한 날카로움이나 위압적인 서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만이 빛난다.
"왼쪽과 오른쪽에 그와 그녀를 두고 가운데에 내가 있다. 세월은 흐르고 그는, 또는 그녀는 세월의
그물에 걸려 은빛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나는 그것을 본다. 그 은빛의 슬픔과 우수와, 그리고 삶의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표류하는 시간을 본다. 잡아지지 않는 무엇, 만져지지 않는 무엇, 거머쥘 수 없는 무엇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그렇게 한때의 시간은 가고 때묻지 않은 새 시간이 온다. 우리는 다시 물위로 기어오르며, 잠수에서 벗어나며, 낯선 세상에 작은, 몹시도 작은
그림자를 조심스레 떨구어 본다." (p.249)
우리는 얼마큼의 시간을 말없이 흘려보내야만 제 앞의 삶을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잊혀지지 않는 밥 세끼의 무서움'을 끌어 안고
오늘 하루를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작가는 그들의 기진한 노고를 위로하고 있다. 내게 가을은 작가 양귀자로 인해 매년 따뜻한 위로의 계절이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