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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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급한 우리는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미리 걱정하고 올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슬픔을 미리미리 우울해 하며 사는 까닭에 삶을 구성하는 질료에는 언제나 걱정과 우울이 팔 할은 차지하는 듯하다. 주말부부로 살기 시작한 몇 년 전부터 나는 걱정과 우울뿐인 하루를 전면 보수하지 않으면 내 삶에 뭔가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미리미리 우울해 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왔다. 나의 가슴엔 미리 자리를 잡은 우울에 새롭게 떠밀려 오는 우울이 하루가 다르게 그 농도를 더해갔다. 그럴수록 하루에 소모되는 담배의 양은 빠르게 늘었다. 담배 연기가 나의 깊은 우울과 걱정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는 한순간에 꺾여버리고 가벼운 우울은 자성체처럼 더 깊은 우울을 불러들이곤 했다.

 

삶의 방식은 적잖이 질긴 것이어서 바꾸자 마음을 먹는다고 선선히 뒤집히는 게 아닌가 보았다. 아기를 달래듯 살살 문지르고 보듬지 않으면 전혀 변하지 않는 질긴 속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똥고집도 그런 똥고집이 없다. 나는 걱정과 우울의 습관을 그대로 둔 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 한 권과 4B 연필 한 자루. 비교적 저렴한 투자였다. 대학 시절, 미대에 다니던 친구들로부터 그림에는 재능이 없다는 일차 판결이 있었던 터라 나는 잘 그리겠다는 욕심은 갖지 않았다. 싸인펜 하나를 들고 집 안 곳곳에 그림을 그리던 세살배기 아이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하루 중 우울과 걱정이 차지하는 시간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줄여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그 덕분에 올해 초 그렇게나 어렵다는 금연에도 도전할 수 있었고 지금껏 잘 유지하고 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라는 솔샤르 정은우의 <아무래도 좋을 그림>을 읽다가 문득 내가 최근에 지나쳐 온 삶의 흔적을 생각해 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혼자 잘 놀고 싶어서'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처도 간섭을 하지 않는다. 서로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소속이 아닌 '내가 몰입하는 일' '세상 속의 내 역할'로써 나를 증명하며 사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가고 있다." (p.15)

 

책은 그가 기록한 짧은 글들과 만년필로 직접 그린 여러 장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주로 그가 다녀온 어느 여행지에서 기록한 그림과 글들이지만 그의 사색은 담백하면서도 웅숭깊다. 게다가 뉴욕 5번가의 거리 모습, 터키 아야소피아 성당의 내부, 대만 스린 야시장의 한 장면, 노르웨이 주택가에서 마주친 길고양이, 샌프란시스코의 노면전차, 서울의 종묘와 창경궁, 교토 은각사와 기요미즈테라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만년필 하나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넘쳐나는 사진의 홍수 속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우리의 삶은 결국 직접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지나칠지도 모를 수많은 일상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누가 내게 여행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그건 이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 보는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라 말하고 싶다." (p.252)

 

제대로 된 그림을 단 한 장도 그려보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시건방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림 그리기의 좋은 점이 삶을 기억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대상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온전히 그 시간을 주목하면서 내가 긋는 선 하나하나, 내가 보는 빛과 어둠의 세밀한 부분부분을 그 순간의 감정과 함께 포착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살았던 시간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과 흡사하다. 물론 내 삶의 궤적은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나선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의식 안팎에 자리 잡은 욕망에 따라서 인식의 대상을 고르는데 이것이 여행지에서 나로 하여금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그러나 둘이서 함께 떠나는 여행은 두 사람이 한나절 똑같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고 해도 각자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둘이 찍은 사진만 현상해 봐도 알 수 있다. 우린 분명 같은 길을 걸었는데 그녀의 필름에는 내가 보지 못한 피사체들이 가득하다." (p.68)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의 생을 살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또 고통을 견디는 것이지만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오직 감정도 없는 디지털 기계 속에 묻는다는 건 왠지 가볍고 가치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지 않는 이유도 그것과 맞닿아 있다. 영혼을 거세당한 느낌, 사진을 찍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내 인생 전체가 저당잡힌 느낌, 나는 그런 게 싫다. 이 책 <아무래도 좋을 그림>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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