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애중독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앞에 나서서 일일이 간섭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옆에서 그냥 말없이 지켜보기에는 가슴이
너무 답답하여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할 일도 다 못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만약 나같은 사람이라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 곁에는 금방이라도 이불
보따리보다 더 큰 불행 덩어리가 '쿵'하고 떨어질 것만 같고,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나도 괘씸죄에 걸려 옷 보따리만 한 불행을 선물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저절로 들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 한둘쯤은 곁에 있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자고로 속이 터지는 일이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너무 꽉 잡는다. 상대가 아파하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 누구의 손도 잡지 말자. 체념하기로 정한 것은 깨끗하게 체념하자.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과는 정말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내가 나를 배신하는 짓은 하지 말자. 타인을 사랑할 바에는 차라리 나 자신을 사랑하자." (p.32)
나오키 상 수상 작가 야마모토 후미오의 출세작인 <연애 중독>에 나오는 주인공은 정말 속이 터지는 인물이다. 나보다 한 열 살쯤
연배라고 할지라도 서슴없이 "당신, 인생 그렇게 살지마라." 충고 한 마디를 나도 모르게 던지게 될 그런 사람이다. 오죽 답답한 인물이면 내가
그렇게 혀를 찰까 싶겠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었던 까닭에 손에서 쉽사리 책을 내려 놓지 못하고 한나절
책에 빠져들었었지만 말이다. 이구치는 전에 사귀던 여자 때문에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조그만 출판사로 회사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생일날 새 직장인 출판사로 다짜고짜 찾아오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인 미나즈키가 그런 이구치를 위기에서 구해주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베일에 싸인 미나즈키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미나즈키는 후지타니와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간간이 번역일을 하면서 낮에는 도시락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느 날 그녀가
일하는 도시락집에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좋아해 마지 않았던 방송인 겸 작가인 이츠지 고지로가 우연히 들른 걸 보게 되었고, 유명인답지 않은 그의 태도에 그만 홀딱
반하고 만다. 결국 사적인 만남은 육체적 관계로까지 이어지고 미나즈키는 도시락집의 일자리를 헌신짝처럼 집어던진 후 이츠지 고지로의 사무실로
출근하게 된다.
"우리의 공통점은 이츠지 고지로였던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똑똑하게 자각해야 했다. 그를 독점하지
말 것, 결코 그와의 정사를 은근히 과시하지 말 것, 대결 의식을 감추고 오히려 그를 공통의 적으로 씹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친해졌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 분위기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p.112)
50대의 이츠지 고지로에게는 이혼한 후 다시 얻은 젊은 부인 외에도 십대 소녀 치카, 미나즈키와 비슷한 연령대의 요코, 이츠지 고지로와
비슷한 나이의 미요코 등 수시로 관계를 갖는 여자가 즐비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바람둥이였던 셈이다. 그에게 여자는 그가 돌보아야만 하는 '새끼 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츠지 고지로는 여자가 요구하는 대로 월급을 주었음은 물론 마음이 내킬 때마다 선물을 사서 안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여자들을 대했다.
"저렇게 제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그대로 입밖에 다
내놓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빈혈은 그를 만나 허둥지둥 따라오는
동안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결과적으로 내가 크게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p.123)
미나즈키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이츠지 고지로의 기사 겸 비서인 동시에 연인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이츠지 고지로의 집 근처에 살았던
미나즈키는 그의 젊은 부인과도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이 여자는 자신을 제1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일부다처제
국가에서 본처는 남편에게 제2부인이 생기는 것을 질투하기는커녕 뛸듯이 기뻐한단다. 본처에게 제2부인이란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고 친구이며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질투심이라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p.275)
미나즈키의 고민은 이츠지 고지로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 남편의 소식을 몹시 궁금해 했다. 다행인지
이츠지 고지로의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그를 떠나기 시작한다. 나이가 많은 미요코가 결혼을 하고, 나이 어린 치카가 다른 기획사 사무실로
떠났고, 요코가 이츠지 고지로의 사무실에 새로 출근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딸과 함께 외국에서 사는 이츠지 고지로의 첫번째 부인이
재혼을 결심하면서 딸 나나를 일본으로 보내는 바람에 그의 부인마저 영국으로 떠난다. 미나즈키의 연적이 모두 제거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반전이
시작된다. 생각도 못한 반전이.
작가가 이혼을 하고 힘들어 하던 시기에 썼다는 이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연애 중독'에 빠진 한 여인의 속 터지는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연애는 심리학적으로 중독이 맞다. 그러므로 연애 중독에 빠진 주인공은 제정신의 독자들이 보기에 속이 터진다. 딸을 가진 아빠의 입장이라면 아마도 책장을 뚫고 소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무 상관도 없는 미나즈키를 소설 밖으로 끄집어 내어 자신의 곁에 앉혀 놓고서 따끔한 훈계 한마디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나처럼 주인공의 삶이 속 터진다 생각했다면 작가는 정말
독자를 깜박 속여 먹을 정도로 글을 잘 썼다는 얘기다. 글쎄, 어느 쪽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