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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잡담
박세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5월
평점 :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에 따라 어느 정도 말이 많아지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해보지
못했음직한 특별한 경험들이 하나 둘 늘어나다 보면 입이 간지러워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어서 자신이 겪었던 그 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일체 함구한 채 태연히 지내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입이
무거운 건지, 답답한 건지 아무튼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고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잘 지낼 수 있는
DNA를 타고 난 셈이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부류에는 속하지 않는다. 너무 수다스럽지도 않지만 묵언수행을 하는 스님처럼
답답하지도 않다. 그래도 어느 한 쪽으로 기우는가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묵언수행 쪽으로 살짝 기운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암튼 대학민국 남성의 수다스러운
정도를 조사한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이상한 주제에 대하여 연구 아닌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어느 사회에서건 한둘쯤은 꼭 존재하게
마련이다.) 나는 적어도 표본오차에 속하는 특이한 인간은 아닐 것으로 믿고 있다.
박세현 시인이 쓴 <시인의 잡담>은 꽤나 특별한 책이다. 시인은 실상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 말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시인에게 '잡담'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그것은 햇빛이 쨍쨍한 날 장화를 신고 출근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한편으로는 시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없으면 이제 시인은 잡담이나 하며 세월을 보낼까, 측은해지기도 한다. 책을 펼치면'시는
죽었는데 시는 그걸 모르다'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블로그에 ‘한 줄의 페허’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조각글들을 책으로 엮었다는 <시인의
잡담>은 '잡담'처럼 쉽게 이해되거나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보낼 만한 성질의 시답잖은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언젠가 대학
시절에 시인이 된 내 친구는 말했었다. '어렵게 쓴 시는 독자도 어렵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이다. '너의 시는 너무 어렵다'는 나의 말에 대한
그의 반론이었다. 이 책이 딱 그렇다. 하나하나의 문장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친구의 논리를 따르자면 시인은 하나하나의 문장에 어지간히 공을
들였다는 얘기가 된다.
"일언지하에 말하자면,
가치라는 말처럼 무가치한 말은 없다.
저마다 자기 언어의 품에서 살아간다.
새겨 읽어야 할 부분은 밑줄 긋지 않은 그 대목이었어."
(p.128)
위의 인용구처럼 시인의 잡담은 시와 아포리즘(경구)의 혼재, 운문과 산문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산문이라기 보다는 길어진 운문이 맞을 듯하다. 책 속에는 시인의 미발표 시도 수록되어 있다. 시가 오롯이 시집에 실리지 못하는 슬픈 현실,
산문집 속의 시는 왠지 모르게 애잔하다. 하기에 그의 잡담을 잡담 수준으로 치부하기에는 쑥스럽고 미안해진다. 그러나 시인의 숙명은 시를 떠나서
살 수 없기에 시인은 산문집을 표방한 한 권의 책에 곁다리로 시를 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덧씌워진 삶의 굴레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시는 시시하고 너절하다. 현실적 가치를 가리는 말은 아니고, 그
속으로 들어갈수록 가파른 벼랑과 마주한다. 누구나 한번 들어간 사람은 되돌아나오지 못한다. 이 시시한 스캔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시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헛소리냐고 하겠지만, 시는 없고, 시 비스무레한 것에 나는 늘 홀린다. 내가 열망한 것은 시엿으나, 내가
도달한 것은 시가 벗어 놓은 헛것이었다. 의붓어미를 친어미로 알고 산다. 이것이 나의 진짜 행복이자 가짜 진실이다."
(p.272)
시는 언어인 동시에 청정한 울림이다. 눈으로 읽는 글자인 동시에 가벼운 떨림이다. 생일 선물로 시집을 주던 시기에 나는 선물로 받은 시집을
닳도록 읽었었다. 내가 읽었던 것은 시인이 쓴 한 줄 시구도, 시집을 선물한 누군가의 마음도 아니었다. 영원을 노래한 우주의 음성, 그 잊을 수
없는 가락에 대한 진한 향수였다. 시가 찬란했던 시절은 온 우주의 날씨가 맑음이었다. 시의 몰락은 우주의 그늘, 두려움의 구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 그늘 속으로 속절없이 흘러들고 있다. 나는<시인의 잡담>을 읽으며 시가 맑았던 어느 한 시절을 망연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