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으로 산책 - 고양이 스토커의 사뿐사뿐 도쿄 산책
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 / 북노마드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5시 55분에 맞춰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깼다기보다 그때까지 푹 자지 못했다는 게 옳다. 내가 일어난 시각은 아마도 4시경이었을 게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빗소리와 높아진 습도 때문에 밤새 뒤척였었다. 잔뜩 흐린 하늘. 여느 날처럼 일찍 집을 나섰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접이 우산을 펼쳐 들고 아파트를 빠르게 벗어났다. 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폐침목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다. 물기 머금은 계단을 오르자 층계참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게 새롭다. 빗길을 걷는 게 얼마만인지... 산의 능선에 이르렀을 즈음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뽀얗게 물보라가 일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 노래는 마치 칭얼대며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반경 2~3미터를 벗어나지 않은 채 주변을 겨우 맴돌다가 빗소리에 묻혀 이내 스러진다.

 

등산로 한켠에서 고양이를 만났다.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고양이였다. 하얀색에 엷은 갈색이 드문드문 섞인 고양이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는 털에 땟국물이 감돌긴 했으나 그나마 보송했는데 오늘은 털이 빗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꼴이 영락없는 새앙쥐다. 온통 비에 젖은 숲에서 제 한 몸을 누일 마른 곳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디로 달아난 것인지...

 

아사오 하루밍의 <고양이 눈으로 산책>을 읽었다. 아침에 만난 고양이를 떠올리면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부터 들지만 아사오 하루밍이 생각하는 고양이는 더할 나위 없이 똑똑하고 사랑스럽다. 물론 작가가 말하는 '내 안의 고양이'는 실물이 아닌 작가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고양이이지만 말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혼자, 또는 지인들과 함께 했던 도쿄 산책을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속에는 실제로 '내 안의 고양이'가 이따금 등장하여 작가의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고, 생각을 바로잡고, 고양이의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내 안의 고양이는 요즘 내 안에서 반만 있다. 매일 옷집 호랑고양이를 만나러 가느라 바쁘다. 옷집 현관 매트에 엎드려 졸고 있는 그 호랑이에게 매일같이 풍뎅이를 잡아 선물하는 모양이었다. 내 안의 고양이는 서로 코를 비비는 고양이식 인사를 하고 싶은데, 호랑이는 풍뎅이를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래도 내 안의 고양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풍뎅이를 잡아 톡 떨어뜨린다." (p.152)

 

사람의 시선으로 도시 산책에 나설라치면 크고 화려한 곳,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가급적이면 도로에 인접한 곳 위주로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사람이 긴요한 볼일이 없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듯한,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길도 주저 없이 드나든다. 오히려 그런 곳이 고양이의 주 통로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고양이는 도시의 한 귀퉁이에 터를 잡고 산 지 단 며칠만 지나도 그곳 지리를 훤히 꿰뚫게 되지만 사람은 도시에 이사온 지 몇십 년이 지나도 뒷골목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서울 촌놈'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부러 나다니지 않으면 동국대학교에서 남산을 오르는 남산 산책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 못한다.

 

작가는 '내 안의 고양이'와 함께 도시의 고샅고샅을 누비고, 식사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도 만난다. 소소한 일상 속에 도시의 낯섦이 파고든 것인지,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소소한 일상을 맞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차를 타고 휭하니 갔을 때는 결코 보지 못했을 풍경들을 작가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감탄하며 기쁘게 기록하고 있다. 이따금 작가는 인간의 감성으로 진지하게 말하기도 한다.

 

"평소에 우리는 땅 위의 사물에만 관심을 두고 지면에 대해선 잊고 산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꿔 요시와라가 지니는 많은 요소 중 우선 '단'을 염두에 두고 마을을 바라보면 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할아버지가 구름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을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 또한 땅 위에서 생활하는 일원으로서, 요시와라에 흥미를 가지는 마흔 넘은 여자로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살고 있다." (p.192)

 

이제 비는 완전히 멎었다.내가 만났던 숲속의 고양이는 배가 불룩한 게 새끼를 밴 듯했다. 사람을 경계하는 차가운 눈매와 공격에 대비하는 낮은 자세로 인해 나는 그 고양이에게 마음을 열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안하무인의 도시는 오직 사람들의 북적임과 떠들썩함으로 영역표시를 하고, 도시에 터를 잡고 살던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행세깨나 하는 양 사람들은 도시를 온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착각하게 되고, 도시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게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고양이의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면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경이로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선물처럼 한아름 쏟아질런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면서도 우연히 만난 고양이의 거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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