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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수학을 좋아한다는 말을 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받게 되는 불필요한 오해나 왜곡된 시선 때문이지요.
예컨대 우리는 수학을 싫어하는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사는 까닭에 여타의 다른 어떤 과목보다 수학을 좋아한다는 한 사람의 솔직한 속내에
대해 '그래. 너 잘났다.', '잘난 체 하기는...', '말도 안 돼!' 하는 투의 눈빛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특별히
싫어한다거나 어떤 원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일종의 시샘이나 부러움일 수도 있고, '다름'에 대한 이해부족 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부러 잘난 체 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따금 이유도 없이 심란하거나 집중이 되지 않을라치면 수학이나
물리 문제를 놓고 한동안 고민하기도 합니다. 끙끙대며 그 문제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해답을 구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결과가 좋았다고 하여 누가
알아주거나 내가 하는 일에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만족이고 일종의 정신적 유희에 그칠 뿐이지요. 나의 이런 성향이 소설을 고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오직 제목만 보고 '재미있을 것이다, 아니다'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책의
제목이 수학과 연관된 경우입니다.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골라 읽었을 때처럼 생각지도 못한 진한 감동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하도 따분하여
결국에는 다 읽지도 못하고 내팽개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 책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쓴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도 읽을까
말까 고민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였고, 앨런 튜링이라는 수학자는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수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앨런 튜링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수학적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지만 말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읽게 된 이 책은 나의 일천한 수학 지식때문에 독서에 방해가 될 정도로 고차원의 수학 이론이 등장하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히려 천재
수학자였던 앨런 튜링의 수학적 성과를 본문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품은 채 책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탓인지
책은 그만큼 수학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지엽적인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했습니다.
"과학지 <마인드>의 논문에서 튜링 박사는 디지털데이터 기계가 향후 '사고'와 비슷한 과정을
수행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으며, 또한 기계를 아이들처럼 교육할 가능성을 논하기도 했다." (p.172)
소설은 앨런 튜링이 자신의 숙소에서 자살을 실행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과에 독극물을 주입한 후 그것을 베어먹고 침대에 누운 것이지요.
2차대전 당시의 업적으로 영국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던 인물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1954년 영국 윔슬로우
애들링턴로드의 한 자택에서 그렇게 발견된 한 남자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젊은 경관 레오나드 코렐이 배정됩니다.
코렐이 앨런 튜링의 시신 옆에서 찾아낸 것이라고는 수학 방정식으로 가득한 수첩 한 권, 그리고 베어 문 사과 반쪽과 친필 편지 한 통이
전부였습니다. 특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다른 추정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없는 명확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코렐은 오히려 의문을 품게 됩니다. 서랍에서 우연히 보았던 훈장이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앨런 튜링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코렐은
많은 커다란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력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코렐은 앨런 튜링의 가족과 연구 동료, 블레츨리파크의 전우들을 만나, 그의 일생을 역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그가 동성애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당시에는 범죄자로 취급되었던 동성애자를 코렐이라고 좋게 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엄마처럼
돌보아주었던 비키 이모도 동성애자였음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앨런 튜링에 대한 코렐의 인식은 바뀌게 됩니다.
독일군의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하여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위대한 수학자는 한낱 혐오스러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를 받아야 했고, 1954년에 그는 끝내 청산가리가 묻은 독사과를 먹음으로써 자살에 이르게 됩니다. 수학에 대한 열정과 노력만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던 천재적인 수학자는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로 인해 희생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과학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의욕적인 한 젊은 경관에 의해 파헤쳐진다는
식의 추리소설 형식을 택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삶과 업적, 평범하지 않았던 그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앨런 튜링을 미리 알았던 계기는 리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연구 때문이었습니다. 소수의 분포와 암호 문제는 필연적으로
리만 가설과 이어집니다. 나는 그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는 리만 가설은 튜링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컴퓨터 개발에 기여했고,
에니그마를 해독함으로써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의 업적보다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540쪽이 넘는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리만 가설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앨런 튜링만이 역설과 모순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뜻할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는 이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 지금도 여전히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탈'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사는 게 노역일 때 우리의 삶이 해치워야 할
것은 다만 '시간'뿐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