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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서영 옮김 / 명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의 시신을 한번이라도 만져본 사람은 안다. 맨손에 전해져오는 그 느낌은 차라리 천길 낭떠러지를 밟은 듯한 삶의 허방, 그 아득함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생명을 잃은 모든 주검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온기가 빠져나간 시신에서 우리는 섬뜩하다거나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욕심의
중력에서 벗어난 듯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함을 먼저 느끼게 된다. 성(聖)과 속(俗)의 갈림이라는 것도 결국 그 아득한 허무를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 터키 여행기 <우천 염천>을 읽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 치고는 그의 여행기는 많지 않다. 너무나도
유명한 <먼 북소리>를 제외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우천 염천>, <위스키 성지 여행>, <하루키
여행법>이 고작이다. 그 중에서 <하루키의 여행법>은 제목만 그렇지 여행기라고 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여행기에
실린 그의 글은 다른 작가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된다. 여행기라기보다 차리리 '디아스포라적 생활기' 또는 '낯선 나라에서 살아보기'라고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일정으로 많은 명소 방문하기를 실천하는 우리네 여행과는 달리 그는 한 나라에서 몇 년을 살아본다거나 적어도 그 나라
전체를 차를 타고 돌아보는 식으로 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우천 염천>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찌 보면 가장 보편적이고 평이한 여행기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사실 소설에서든 수필에서든 작가의 묘사는 어느 누가 읽어도 '아, 하루키의 글이군.' 금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면서도 탁월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하루키다운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하루키의 광팬이라고 자부하는 나의 눈에도 '이건
아니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그리스정교의 성지인 아토스 섬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는 길에 만난
대책 없는 장대비(雨天)와 터키의 마을을 돌아다닐 때의 불볕더위(炎天)로 인해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인데 이 책이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간략한
스케치에 그쳤던 탓도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작가를 대신하여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우리는 이곳에서 흠뻑 젖어버린 여행용 신발을 벗고 양말과 바지를 새로운 것으로 바꿔 입은 뒤 점심식사
대신 크래커와 치즈를 먹었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먹었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 당연하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졌다. 너무나
편안한 잠이었다. 비를 맞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이렇게 나약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좀더 심한 비를 3일 정도 맞는다면
종교에 귀화해버릴지도 모른다. 수도원의 침대는 우리에게 그만큼 고마운 존재였다." (p.54)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해에 하루키는 그리스의 성지인 아토스 반도와 터키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책에서 아토스에 관한 애기를 읽은
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는 아토스 반도. 그곳에는 현재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약 2천여 명의 수도승들이 엄격한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수도원이 처음으로 세워진 비잔틴 시대와 다름없이 소박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밤낮으로 기도를 드리는 수도승과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족하며 사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작가는 '확신에 가득찬 진짜 세상'을 보았던
듯하다.
"나는 처음에 쓴 것처럼 종교적인 관심이라고는 거의 없는 인간이고 그렇게 쉽사리 뭔가에 감동을 하지
않는, 굳이 말하자면 회의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토스의 길에서 만난 야생동물처럼 지저분한 수도승으로부터 "마음을 바꿔서 정교로
개종을 한 뒤에 오시게."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상황을 이상하게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 그것은 종교 운운하기보다 인간이 사는 방법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점에서는 전세계를 뒤져봐도 아토스처럼 농밀한 확신에 가득찬 땅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에세
그것은 의심할 구석이 없는 확신에 가득 찬 진짜 세상 그 자체인 것이다. 캅소카리비아의 그 고양이에게 곰팡이가 핀 빵은 세상에서 제일 현실적인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정말 현실 세계인가?" (p.109)
터키여행은 4륜구동차를 타고 흑해 연안을 따라 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하루키는 운전면허를 땄다고 한다. 초보운전 표지를 달고 시작된
21일간의 터키 여행은 작가에게 그닥 우호적이지 않았던 듯 보인다. 길을 물으면 아무말 없이 차에 올라타 찾는 곳까지 안내하고는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곤 하던 터키 사람들의 과잉 친절,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풀어놓은 것만 같은 앳된 얼굴의 순진한 군인들과 지나친 검문 검색,
말보로 담배 한 개비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시골 남자들의 순진함과 담배 사랑, 이란 국경 힛카리 마을에서의 위험천만했던 경험, 24번 국도의
목숨을 건 운전 등은 '반 고양이'를 직접 보고 싶어 햇던 작가의 기대도 무색하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강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어째서인지는 나로서도 잘 알
수가 없다. 나를 끌어당긴 것은 그곳 공기의 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곳 공기는 그 어느 곳과도 다른 뭔가 특수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부에 와닿는 감촉도 냄새도 색깔도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이제까지 맡아왔던 그 어떤 공기와도 달랐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공기였다. 나는 그때 여행의 본질이란 공기를 마시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기억은 분명 사라진다. 그림엽서는 색이 바랠 것이다.
하지만 공기는 남는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공기는 남는다." (p.142)
터키 여행은 작가에게 힘들었던 경험인 듯하다. 처음 방문했을 때 맡았던 '공기의 질' 같은 것에 이끌려 7년만에 다시 방문했던 터키에서
작가는 에게 해 근처의 잘 알려진 관광지를 피하여 오지로만 돌았는데 작가는 어쩌면 터키 국민의 내밀한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여정은 힘들었을 테고. 작가는 길이 끊긴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도 했고, 이방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국경 근처의 마을을
통과하기도 했고, 석유 운송 트럭이 질주하는 편도 1차선의 24번 국도를 달리기도 했다. 작가의 이야기에서 독자는 속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최소한의 온기를 지닌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의 우천(雨天) 아닌 열기로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염천(炎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치열하게 다툴지라도. 성(聖)과 속(俗)은 에게해를 건너는 것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