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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니를 보라 - 세상에 불응한 여자들의 역사
박신영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사실 역사서나 역사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90년대 역사소설이 유행했던 시절에는 나도 시류에 이끌려 주구장창 역사소설만
읽었었다. 귀가 얇은 탓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소설의 인기가 바닥을 치는 까닭에 나도 덩달아 역사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역사서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일본의 대만계 역사 소설가 진순신이
쓴 <십팔사략>을 읽었을 때였다. 특히 <십팔사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은나라의 주왕과 달기로부터 시작되는
<십팔사략>은 인간군상의 탐욕과 애욕, 배신, 권모술수, 지략, 처세 등 인간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까닭에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은 달라진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사설이 길었다. 각설하고,박신영 님의 <이 언니를 보라>는 열네 명의 역사 속 여자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파헤쳐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미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거상 김만덕, 헬렌 켈러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거나 잘 알
만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 에피소드 형식의 단편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마다 여러 문헌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속에 작가의 시선을
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실, 그녀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말초적인 성관계 에피소드보다 다른
곳에 있다고 난 생각한다. 도덕적인 면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미실의 상대 남자들도 같은 정도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즉 제수씨이자 처조카를
후궁으로 삼은 진흥왕도, 친누나와 성관계를 가진 미생도 다 같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개 권력자 남성의 성생활은 비난받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성생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다." (p.21)
어떤가? 위에 인용한 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면 당신은 분명 남성, 그것도 까칠한 성격의 남성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나는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내 성격이 무던하거나 남성의 권리 주장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한심한 놈쯤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사실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에 가깝고 사회적 이슈에도 민감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럴 수가... 생각하시겠지. 그것도 다 역사서를
읽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면... 아무튼 내가 이제껏 역사서를 통해 배웠던 진리는 단 하나, 인간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이나 판단이 구구절절 다 옳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요, 역사 속의 여러 시대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의 사실을 현대의 가치관과 제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는 의구심이 있다. 예컨대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평생 지적만 당하며 살았던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천 번 만 번 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 루이자 본인은 평생 행복하다고 생각했을지 어찌 알겠는가.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가감과 수정 보완이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시절을 완벽히 재현하지 않는 한 역사에 대한 객관성은 결코 담보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각색되고 편집된,
심하게 말하자면 한 개인이 바라본 지난 과거에 대한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역사에 대한 선악적 가치판단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의 환경에서 현대인의 가치관에 입각한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그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기에 앞서 현상을 바라보는 바른 생각, 즉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상이나 정신은
언제나 환경이나 육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행복하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편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도
불행하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다름'을 추구하고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날 때 인간 세상은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은 끝없이 '같음'을 추구하는 한편 '같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 예컨대 자신이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거리에서 만나면 불편하고, 자신과 같은 성격의 사람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다름'에 대한 현대적 견해를 독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대건 시대적 본류에 속하지 않았던 몇몇
인물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주목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평가자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인생이란 어차피
'다름'을 인정하고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견해가 나와 다르기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하고 모든 게 아름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