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방문한 독일 메르켈 총리의 거침없는 말과 행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2005년 총리 취임 후 10년 동안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여성 지도자로서 주목받았다기보다 뚝심있고 올곧은 행보를 보여줌으로써 세계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도 2013년 그녀는 독일 총리로서는 최초로 다하우 나치 강제 수용소를 찾아 고개를 숙였고, 올해 1월에도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연설에서 "나치의 만행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 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여성 총리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일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베를린 일독 센터' 강연회 차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전범국가로서 반성과 참회로 일관해도 용서를 받기 어려운 마당에 망언과 그릇된 야심을 드러냄으로써 동북아 국가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아베 총리에게도 '역사를 직시하라'며 일침을 가했다. 이와 같은 메르켈 총리의 행보에 대하여 독일의 한 신문은 "메르켈 총리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영토와 과거사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을 것"이라며 "그는 일본에서 이 문제를 아주 노련하게 해결했다"고 평가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언론도 호평 일색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메르켈 총리를 보면서 같은 여성 지도자를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독일 국민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면에는 무능한 지도자의 표본으로 비춰지는 여성을 자국의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다는 자괴감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도 느긋하기만 하더니 주한 미국대사의 부상 소식을 해외에서 듣고는 귀국과 동시에 병원으로 내달렸으니...

 

김기종의 만행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그야말로 미친 X이다. 어떤 말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범죄를 저지른 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범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면수심의 인간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때마다 대통령이 달려나가 사과할 것인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슬람국가(IS)의 참수 동영상에 어김없이 등장해 서양인 인질들을 무참히 살해한 장본인이 쿠웨이트계 영국인 2세인 엠와지라고 하여 영국 총리가 미국에 사죄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IS에 가담한 한국인 10대 김모 군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가 미국에 잘못을 빌어야 옳은가. 자국민의 잘못으로 인해 동맹국인 미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니 말이다.

 

리퍼트 대사의 피습 직후 정치권의 대응은 가관도 그런 가관이 아니었다. 마치 신파를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한 정신병자의 범죄를 두고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확대 해석하는가 하면 종북 세력에 의한 조직적인 '테러'로 보는 듯했다. 미국은 일관되게 테러라는 용어 대신 공격이나 폭력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에 대한 과잉충성을 드러내는 듯한 이런 행태는 정치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 대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 대사의 쾌유를 비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한성총회 소속 신도들의 부채춤 공연과 공화당 신동욱 총재(박근혜 대통령의 제부)의 ‘석고대죄 단식’ 등은 신파를 넘어 저질 코미디로 비춰진다. 마치 김정은 앞에서 충성맹세를 하는 북한 주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신도 과도하다는 지적을 하는 걸 보면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진다.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복종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독립 국가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민들의 자존심도 생각해야 했었다. 국익과 나라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과잉 애정공세를 펼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이번 사태를 보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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