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단 며칠의 짧은 휴가를 받은 내가 얼굴만 겨우 아는 누군가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어느 작은 마을을 산책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휴가는 한번쯤 지루함을 느낄 만큼 길지 않아야 하고, 짧아서 오히려 아쉬움이 남는 그런 정도면 좋겠고, 동행하는 사람은 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하여 내 속내를 스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이라면 좋겠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어도 서로를 어색해 하거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고, 혹여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산책에 방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외딴 곳이었으면 좋겠다. 하루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무중력의 삶'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소설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의 한시적인 삶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하루키 소설은 대개 흥미진진한 전개와 몰입도를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특유의 허무주의로 귀결되곤 한다. 소설 속에 기이한 사건들이나 의미심장한 장면들이 많지만 그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나 깔끔한 결말 없이 독자들의 판단에 내맡기는 식이다.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도 삶을 움켜쥐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그저 스쳐지나는 풍경처럼 비춰진다는 것이다. 상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어느것 하나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의 개성과 특유의 스타일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는 이 작품을 통하여 '군조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하게 된다.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1970년 8월 8일에 시작하여 8월 26일에 끝나는 18일 동안의 이야기로서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는 주인공 '나'가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인 항구도시로 내려와 겪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인 '쥐'와 바에서 맥주를 마셔대며 보낸다. '내'가 '쥐'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사고 때문이었다. 둘은 만취하여 운전을 하다 차가 거의 박살날 정도로 큰 사고를 낸다. 그러나 둘 다 숙취에 시달릴 뿐 다친 데 없이 멀쩡하다. 21살의 '나'와 22살의 '쥐'는 그렇게 어울려 지낸다. 어느 날 '나'는 바의 화장실에서 만취해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하여 집까지 바래다 주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녀와 친해진다. 그러나 그녀와 친해질수록 알 수 없는 고독감이 커져만 간다.
사실 이 작품은 소재의 특이성이나 스토리 구상의 기발함 때문이 아닌 하루키의 문장력이 인상적이다.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와 신선한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나는 이따금 이 책을 들춰 볼 때마다 이것이 하루키의 초기작이라는 생각을 잊곤 한다. 이제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한 풋내기 소설가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전개와 막힘 없는 문장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죽은 인간에 대해 무슨 말을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죽음으로, 그녀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살아남은 우리들은 해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는다. 때로 나 자신이 한 시간 단위로 나이를 먹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그것은 진실이다." (p.109)
작품 전체에서 느껴지는 상실감과 공허함은 하루키 문학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특이한 에피소드와 세밀하고 감성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독자들에게 툭 던져놓는 듯한 작가의 전개 방식은 어떤 결말이나 해석을 유보한 채 그 전권을 독자들에게 떠넘긴다. 때로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불만일 때도 있지만 전체의 맥락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관되게 유지하는 작가의 필력은 참으로 대단하구나 느끼게 된다. 하여 하나의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나는 여름이 되어 그 거리로 돌아가면, 늘 그녀와 걷던 길을 걷고, 창고의 돌계단에 앉아 혼자서 바다를 바라본다. 정작 울고 싶을 때는 오히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법이다." (p.169)
하루키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재미있다.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지금은 반쯤 잊혀져 기억도 아련한 그의 소설이 돌연 생각날 때가 있다. 오늘도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고 다 읽을 때까지 책을 놓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몹시 언짢은 일이다. 거짓말과 침묵은 현대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두 가지 거대한 죄라고 해도 좋다. 실제로 우리는 곧잘 거짓말을 하고, 심심하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일년 내내 조잘거리고 그것도 진실밖에 말하지 않는다면, 진실의 가치 따위는 없어지고 말지도 모른다."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