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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나 봅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80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라는군요.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낮잠을 자기 위한 용도로 알맞은 두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곤한 국민들이 그 책을 베고 누워 잠깐의 오수를 즐겼으면, 바라는 대통령의 애민정신(?)이 숨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의 정가가 28,000원이고 10%를 할인받는다 해도 25,200원이니 목침 가격으로는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단 하나 좋은 점은 양장본이라 잠을 자다가 나도 모르게 침을 흘려도 크게 피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1쇄로 찍은 1만 5000부가 모두 팔려 2쇄를 준비하고 있다 하니 그만한 가격에 목침을 준비하기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이러한 기현상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성인 중에 목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읽은 책 중에 회고록은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가 먼저 떠오르는군요. 그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회고록이라고 늘 생각해오던 책입니다. 아, 이런!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의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엉뚱한 이야기로 서두가 길어지고 말았네요. 서로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흔적들을 속속들이 밝혀낸다 한들 그 사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따금 의문이 듭니다. 나의 결론은 언제나 부정적이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그 사람의 행위만으로는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고록을 쓴 전직 대통령만 하더라도 자신은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믿었을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국민들 중에 그렇게 믿었던 분은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의 가정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의 마음이나 습관을 잘 안다고 믿지만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와 반대 되는 대답이 나오곤 하지요. 우리는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할 뿐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조앤은 자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로드니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을 사랑했지만 알지는 못했다.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참된 진실보다는 유쾌하고 편안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야 자신이 아프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몰랐다." (p.201~p.202)
<봄에 나는 없었다>는 추리작가로서 명망이 높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전혀 다른 색깔의 책입니다. 추리소설이 아닌 심리소설의 범주에 속할 법한 그런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한 중년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세 명의 자녀를 둔 엄마로서 뒤돌아볼 겨를 없이 바쁘게 살았던 조앤 스쿠다모어는 자신의 삶이 무난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고 믿는 여인입니다.
비록 시골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지만 자상하고 유능한 변호사 남편, 다들 장성하여 일가를 이룬 아이들을 생각할 때 조앤은 자신의 인생이 행복했다고 자평합니다. 딸의 병간호를 마치고 바그다드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던 길에 여고 동창 블란치를 만납니다. 고교 시절 예쁘고 똑똑했던 그녀는 몇 번의 이혼과 재혼으로 이제는 천박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렇게 변한 그녀가 안됐다고 생각하는 조앤은 속으로 우쭐한 마음마저 듭니다. 폭우로 교통이 끊기는 바람에 조앤은 사막의 기차역 숙소에서 발이 묶입니다. 읽을 책도 없고 대화할 상대도 없는 기차역 숙소에서 조앤은 무덤 같은 숙소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을 걷는 것 말고는 아무 할 일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조앤은 이 며칠을 그동안 바라던 온전한 자기만의 휴식 시간으로 삼기로 마음먹지만 블란치가 던진 몇 마디 말이 불씨가 되어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조앤은 - 남들이 며칠 지나면서 그랬듯이 - 환상을 보았다. 자신이라는 환상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사사로운 부분에 신경쓰는 평범한 영국인 여행자로 보였겠지만, 그녀의 마음과 정신은 사막의 고요와 태양 아래서 밀려왔던 치욕스러운 자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p.222)
농장을 가꾸며 농부의 삶을 살고자 했던 남편 로드니, 주관이 뚜렷했던 맏딸 에이버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채 아프리카로 떠난 아들 토니, 서둘러 결혼하여 바그다드에 정착한 막내 바버라, 조앤은 그들 모두가 자신의 고집과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부인으로서, 엄마로서 약간의 강제성이 개입되었다 할지라도 현명한 조언을 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가정을 별 탈 없이 지켜왔다고 믿었는데 하나하나 되짚어 갈수록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로드니는 에이버릴에게 "인간은 하고 싶은 일 - 타고난 일 - 을 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했다. 바로 그것이 조앤이 로드니에게 한 짓이었다...... 조앤은 새로 알게 된 이러한 사실들을 초조하게, 열을 내며 변명하려 했다." (p.217)
조앤이 쌓아올린 지금까지의 삶이란 게 부유하고 윤택하며 남들이 보기에 행복한 모습으로 비춰졌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을 때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고 후회스러운 일들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볼 때도 언제나 타인의 눈을 통해서 본다."고 했던 니체의 말이 떠오릅니다.
"맞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러는 건 아니야. 시골의 변호사는 인간관계의 약한 면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는 사람이야 - 의사를 제외하면 말이지. 그래서 이 일을 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는 것 같아. 인간이란 원래 나약하고, 두려움과 의심과 탐욕에 약한 존재지. 그런데 가끔은 예기치 않게 이타적이고 용감한 인간을 보게 돼. 어쩌면 변호사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은 폭넓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몰라." (p.136)
바쁜 일상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끝끝내 모른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게 우리네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의 관점이 아닌 상대방의 관점에서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삶의 지평은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일은 아닌가 봅니다.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까닭도 거기 있는 듯합니다.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잘못된 게 있을라구요. 모든 게 옳고 모든 게 칭찬받을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