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자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이 사람 도대체 전공이 뭐야?',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다. 철쭉 가득한 화단에 생뚱맞은 노란 수선화 한 그루 서 있는 것처럼. <탈주자>의 저자 리 차일드는 그런 사람이다. 전 세계의 많고 많은 작가군(群) 속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 광대한 스케일의 소설을 쓰면서도 1000m 거리를 날아가는 총알이 중력에 의해 얼마나 끌어당겨지는지 계산하고 있는 사람. 미 국방부와 FBI의 사정을 제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 생뚱맞기보다는 신선하다.

 

"비행을 시작한 지 0.5초가 흐른 시점에 총알은 400미터를 날아갔고 왼쪽으로 18센티미터 움직였다. 그리고 18센티미터 밑으로 떨어졌다. 중력이 잡아당긴 것이다. 중력이 잡아당길수록 총알은 느려졌다. 총알이 느려질수록 중력은 총알을 더 많이 빗겨나가도록 했다. 총알은 완벽하게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총열을 떠나고 1초가 지난 총알은 800미터를 날아갔다. 달려가는 맥그레스를 지나친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지만, 아직 나무들 위를 날고 있었다. 목표물에 맞으려면 아직 200미터를 더 날아가야 했다." (p.513)

 

'리 차일드'의 소설은 처음이다. 셰필드의 법과대학에서 공부하고, 그라나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20여 년 동안 송출감독을 했던 그가 소설가로 성공한 것도 의외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경쟁이 치열한 영미권의 추리소설계에서 신예작가와 다름없었던 그가 단번에 베스트 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영화도 그렇지만 나는 영웅주의 액션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007 시리즈를 열심히 보긴 했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 시큰둥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 세계 영화팬을 상대로 헐리우드 블로버스터가 끝없이 제작되는 걸 보면 책이든 영화든 액션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내가 리 차일드의 소설 <탈주자>를 읽으면서 느꼈던 소감은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전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광대한 스케일도 그렇고, 미국 국방부와 FBI를 다루는 솜씨도 그렇고, 소설 전편에 등장하는 각종 무기에 대한 묘사도 그랬다. 작가는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한 사람의 영웅을 내세움으로써 그렇고 그런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언제나 해피 엔딩의 결말을 보여주는 여타의 소설이나 영화와는 차별점을 보여준다.

 

그러한 차이가 신예 작가와 다름없었던 리 차일드를 베스트 셀러 작가로 성장시켰음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가 전면에 내세운 일당백의 영웅 잭 리처는 다른 스릴러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직 군수사관이자 지금은 조기 제대하여 미국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 중인 잭 리처는 맨손으로 서너 명의 사내들은 가볍게 제압하고, 그의 손에 저격 총이 쥐어져 있다면 십수 명의 군인들과도 일당백으로 대치할 수 있으며, 제압을 당한 상황에서도 적의 심리를 파악하고 주위 사물을 관찰함으로써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리 차일드만의 독특함은 잭 리처를 다루는 세밀함에 있는 듯하다. 대개의 하드보일드 스릴러물에서 작가는 빠른 전개를 염두에 둠으로써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곤 한다. 이런 치명적인 실수는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킨다. 그렇다고 무작정 세부 묘사에만 치중할 수도 없다. 추리소설에서 속도감은 거의 생명과 같기 때문이다. 이 둘의 적절한 조화는 생각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 리 차일드는 <탈주자>에서 빠른 전개와 더불어 세밀한 묘사를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품을 읽는 독자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영웅주의 소설이 다 그러하듯 스토리 위주로 쓰였으니 스포일러는 되기 싫고... 딱히 덧붙일 말도 없다. 잭 리처의 영웅담이 가을의 정취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재미는 있다. 다만, 시간은 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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