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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숙의 <바이올렛>은 동사에 주의하며 읽어야 한다. '공허한 시선이 거리 풍경을 헤매'기도 하고, '네온 불빛이 그녀의 침묵 속으로 끼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도 하며, '불안이 와아 와아 와아, 솟아나서 잔 올챙이들처럼 와글거리'기도 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어제만이 살아 있'는가 하면, '그 남자와 재회하기 이전의 시간과 어제 그남자와 재회한 이후의 시간에 대해 분명히 금을 긋'기도 한다.
<바이올렛>에서 그녀의 문체는 '백합의 흰 색이 눈을 되찔러오는' 것처럼 몽환적이다. 현실의 다른 층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장면을 독자의 의식 속에 두서도 없이 펼쳐 놓은 것처럼. 비현실적이라거나 SF 영화처럼 가능성 없는 미래와는 다른, 뭔가 부족하고 나와는 아주 멀리 동떨어진, 그러면서도 지구상의 보이지 않는 어느 지점에서 생생히 재현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비현실적인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겠지만 아무튼 그녀의 소설은 그렇게 전개되어 간다. 작가가 그려내는 현실은 마치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내 현실의 지면으로 끝내 내려앉지 않았다.
"하늘이 그대로 쏟아져서, 푸른 물을 확, 그녀 얼굴에 덮어씌우는 것 같다. 정말 무지개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여진다. 가슴이 싸르륵 쓰라려온다. 따라갈 수 없는 서러움. 닮아볼 수 없는 안타까움. 먼, 멀디먼 그리움. 그녀는 방향도 없이 공허하게 앞을 향해 걷는다." (p.175)
소설 속의 주인공인 그녀는 '오산이'라고 했다. 그녀의 고독은 미나리 군락지가 드넓었던 시골 소읍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이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에서 이씨가 아닌 학생은 오직 그녀와 단짝이었던 남애가 유일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불안했던 산이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줄곧 아버지와 함께였던 남애는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소식도 없던 산이의 아버지가 돌아오고 쌓였던 분노를 표출하는 어머니, 남애를 만나 위로를 구하려던 산이는 작은 오해를 끝내 풀지 못하고 결별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고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그녀. 그녀는 믿었던 어머니로부터 또 여러 차례 버려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미장원 보조 생활을 그만두고 화원에 취직한다. '꽃을 돌보는 여자'가 된 그녀. 스물세 살의 그녀는 화원 주인남자의 조카, 수애와 함께 산다. 그해 여름, '바이올렛'을 찍기 위해 화원에 들렀던 사진기자인 그 남자가 그녀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남자로 인해 방황하는 그녀.
"그에게 전화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둘이 마주 앉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너 자신이 지금 끌려다니는 것이 무엇이지? 그의 고백이냐? 아니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냐? 두 질문을 놓고 그녀는 자주 소철에 이마를 대고 서 있다. 권태로운 여름은 그녀에게 공허한 함정을 파놓고 떠날 모양이다." (p.184)
그 남자를 마음에 품을 수 있었을 뿐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그녀. 그녀 마음의 가장 밑바닥엔 어린 시절 남애로부터 갑자기 내팽겨쳐졌던 고독이 불타고 있었음을 , 그 고독이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전에 가버리라는 외침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그녀는 인식한다. 그 남자를 잊지 못한 채 방황하는 그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남애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수녀가 되었다는 소식만 전해듣는다. 다시 화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결국 사진기자인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술좌석에서 고백아닌 고백을 했던 그 남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추억이 되지 못한 욕망은 여름 내내 너무 파릇파릇하거나 격렬하게 불타올라 그녀를 방심 상태로 이끌어가곤 했다. 소통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슬픔에 사로잡힌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신지? 하고 물었던 그 남자로 하여 지금 그녀는 야릇해져 있다." (p.265)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남자와 헤어진 그녀는 결국 화원의 단골이자 그녀를 끊임없이 유혹했던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겁탈을 당한다. 광화문 사거리,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의 화원에 취직했던 '꽃을 돌보는 여자'인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녀는 그렇게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스러진다. 그해 여름, 말하자면 스물세 살이 되었던 그해의 여름은 그렇게 흘러갔다.
오늘처럼 군데군데 우울이 물드는 날엔, 낙엽지듯 쓸쓸함이 번지는 날엔 내가 이만큼 살아냈구나, 안심하게 된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세월을 서너 번쯤 건너 뛴 듯한 느낌이 들곤 하지만, 뭐 그래도 괜찮겠다 싶다. 그녀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스러졌던 그해의 여름은 오늘 내게, 젊었던 시절의 여름 더위를 지나쳐온 내게, 장애물 경주를 하듯 정신 없이 세월을 건너뛰었던 내게 안심하라 다독이는 듯하다. 세월이 가뭇없이 흘러 벌써 여기까지 온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