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미래의 어느 시점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예측 가능한 불행을 자신에게 따끔한 말로 경고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대체로 자신의 인생을 낙관하거나 실현 가능하지 않은 장밋빛 인생을 상상하는 까닭에 곧 닥쳐올 불행보다는 오히려 백만장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자기계발서가 인기 있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지 싶다. 어찌어찌 하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자기계발서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당첨 가능성도 없는 로또 복권 한 장씩을 쥐어 주는 셈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독자는 지난 회차의 로또 복권을 들고 마냥 기뻐한다. 그 시간에 다음 회차의 복권을 살 돈을 마련하는 일이 먼저인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야마 아마리가 쓴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하는 장황한 설명을 듣기보다는 누군가의 삶의 기록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도 없을 것이다. 실로 이 책은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반성하도록 만든다. 오늘도 무사했으니 내일도 무사할 것이라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았던, 또는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고향에 있을 때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적의 행군을 막으려면 술과 고기를 베풀어라.'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평생의 꿈을 가로막는 건 시련이 아니라 안정인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 그래서 오늘 이 만찬을 계기로 다시 나의 오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어." (p.168)

 

예컨대 공공 도서관에서 몇 년째 공인 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있다고 하자. 그녀가 공부하는 자세나 각오는 기한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학생들의 시험공부와는 다르다. 그녀가 비록 올해 또 떨어진다 한들 그녀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낙방한 자신에게 실망하여 안일했던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수험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나는 공인 중개사 수험서를 읽는 것이 취미예요.'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데드 라인이 없기 때문이다. '1년 뒤에도 떨어진다면 다소 굴욕적이고 한심한 인생이지만 공인 중개사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접고 연금이나 자식의 보살핌에 기대어 남은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지금껏 해왔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인생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서른 살이 되는 날 이 세상을 떠날 거라는 결심,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날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맞이할 거라는 다짐은 이제 더이상 취소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졌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한 번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스틱스 강을 건너 버린 것이다." (p.51)

 

책의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떤 특기도, 재능도 없었던 아마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던 회사를 1년만에 그만두고 파견사원으로 전전한다. 그녀에게는 대학 시절부터 사귀었던 남자 친구도 있었고, 성실하게 일하시는 아버지도 있었다. 파견사원이라는 불안한 신분은 그녀의 인생을 스쳐가는 잠깐의 고난쯤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남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믿었던 아버지마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얘기가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통째로 떠넘겼던 그녀의 행복한 미래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어머니 손에 맡기고 그녀는 3평짜리 월세방을 얻어 독립한다. 그날이 그날 같은 월급 17만엔짜리 파견사원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스물아홉 생일을 맞는다.

 

얼굴도 못생긴 데다 73킬로그램이 넘는 외톨이 파견사원의 삶이 절절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결국 자살을 결심하지만, 죽을 용기마저도 내지 못한다. 살아갈 용기도,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며 텔레비전 화면에 무심코 시선을 던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너무도 아름다운 세계’에 전율을 느낀다. 그곳은 바로 라스베이거스였다. 난생처음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간절함과, 가슴 떨리는 설렘을 느낀 그녀는 스스로 1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한다.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고로 멋진 순간을 맛본 뒤에 죽는 거야. 내게 주어진 날들은 앞으로 1년이야.’ 그날부터 인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라스베이거스에 갈 여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평소라면 생각도 못한 다양한 직업에 뛰어든다. 낮에는 파견사원으로, 밤에는 긴자의 고급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주말에는 누드 모델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한다. 어차피 죽을 몸 그녀에게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나간 적 없었던 동창회에도 나가고, 술집에서 일하는 다른 여종업원들과도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서 친구가 된다.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미나코는 방향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눈앞의 목표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삶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바다는 목표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범선은 타륜으로써 방향을 잡지만, 돛과 노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미나코와 나는 각각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p.146)

 

그녀는 결국 목표했던 200만엔을 벌지는 못하였지만 150만엔을 들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최고급 호텔에서 자고, 비싼 식사와 마사지 등 그녀가 1년 동안 꿈꾸었던 호사를 자신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 여기며 맘껏 누린다. 그리고 1년 동안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공부했던 블랙잭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 인생을 건 4시간 동안의 마지막 승부! 돈을 다 날린 채 준비해 간 수면제를 삼킬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프로 갬블러와의 대결에서 5달러를 딴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생을 건 1년 간의 사투에서 그녀가 승리했음을 선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단 6일을 위해 1년을 살았고, 삶을 끝내기 위해 6일을 불태웠다. 그 끄트머리에서 '20대의 나'는 죽고 30대의 내가 다시 살아났다. 이제부터 맞이하게 될 수많은 '오늘들'은 나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내일'이란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의 인생은 천금 같은 오늘의 연속일 테니까." (p.234)

 

살아서 귀국한 그녀는 자신이 몸담았던 모든 시한부 직업들을 그만둔다. 파견사원도, 호스티스도, 누드 모델도. 그녀는 1년 후 글로벌 회사에 정사원으로 취직한다. 스물아홉 살 이전의 아마리 이야기는 우리네 보통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데드 라인을 정하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다. 직업의 귀천을 논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제임스 딘)하는 문구가 늘 들어오던 관용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순간순간 데드 라인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미래는 안녕한지 이따금 물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