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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책의 제목이 맘에 쏙 들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하루종일 내렸던 어제, 나는 아침부터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까닭도 없는 본원적 슬픔이 찾아들고 나는 그때마다 죽음과 같은 안식을 느끼곤 한다. 감정의 골을 깊게 파면 그 바닥에는 언제나 슬픔의 강이 흐른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연의 슬픔은 평화의 다른 표현일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하여, 처연한 슬픔은 오히려 평화롭다.
나는 이런, 다소 쓸쓸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이따금 음악처럼 들리는 빗소리와 물동그라미의 잔상을 떠올리며 아들 녀석의 어릴 적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대여섯 살 무렵의 아들은 뜀박질을 좋아했다. 저만치 앞서 달려가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환하게 웃곤 했다. 비 온 다음날의 외출에서는 인도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로 힘차게 튀겨 바지를 흠뻑 적신 적도 많았다. 그것은 말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아이가 자라 이제는 제 주관대로 하려 든다. 조금 더 자라 성인이 되면 제 어릴 적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창문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네 여자는 간이역에 앉아 먼 곳에서 당도할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탈 기차가 오면 한 명씩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향할 것이었다. 누군가는 남아 손을 흔들어주고 누군가는 그 모습을 스케치할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자리, 그 시간, 그 열정... 이날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빗금이 새겨졌을까. 중요한 것은 두려워도 이 생生을 천천히 잘 걸어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도,부모도, 동무도, 스승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온전히 자신의 몫인 마술 같은 시간들..." (p.133)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은 저자가 만난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연극배우, 화가, 영화감독, 에디터, 만화가, 뮤지션, 여행작가, 건축가, 시인 등 13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국경을 넘는 심정으로 이 도시로 흘러들어온' 청춘들. '더디게 오지만 결코 없지 않은 희망을 충실히 일구는 사람들'과 함께 저자는 이 미로와 같은 세속을 걷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책에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그 반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이미 쇠잔해진 느낌이다. 자본주의란 본디 그런 것이라고 누군가 한번쯤 솔직하게 말해줬더라면 내 청춘은 달라졌을까?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외줄을 타는 곡예사의 발걸음처럼 자신만의 길을 오롯이 걷는 13인의 청춘들. 저자의 시선은 그들의 쓸쓸한 등을 토닥이고 있다. 안정적인 직장, 높은 수입, 조건에 맞는 결혼, 넓고 편안한 집 등 우리 사회가 이 시대의 청춘에게 강요하는 조건들은 해를 더할수록 늘어만 간다. 그 욕망의 틀을 부수고 황량한 들판으로 나선 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저자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 자신이 불편해졌다고 할까요.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너무 멀리 이탈해버렸다는 자괴감이 시시때때로 제 자신을 괴롭혔으니까요.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면 저는 그런 삶에서 아득하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던 거죠. 매일 같이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하루는 일하고 있던 웨딩숍으로 현대문학 외판원이 구독신청을 하라고 들렀어요. 문학이라는 막연한 환상도 있었지만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에 1년 구독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 우연히 한 대학에서 문예창작전문 과정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돼요. 살면서 사 본 시집이라고는 다섯 권도 안 되는데 무작정 등록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p.344)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부딪치고 무너지고, 또 부딪치고 그렇게 또 무너지고... 그들 청춘의 모습은 애잔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언젠가 한 번쯤은 내 삶의 기준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되돌릴 수 없는 삶에 쓴 소주를 마시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나만의 삶을 찾는다는 것은 그 후회의 순간을 대비한 보험증서일지도 모른다. 비록 처참히 무너져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에 속아도 보고 껶여도 본 자들, 한 번쯤 삶에 굴절되어도 보았으나 연민이란 거울방에 갇히지 않고 희망 없이 희망을 꿈꾸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나는 '동무'라고 부른다. 이 인터뷰는 '동무'들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이 지나왔을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는 글> 중에서
도시의 어두운 골목 저 끝에는 희망의 등불을 밝힌 채 오늘도 밤새 뒤척이는 청춘이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등대는 밝음을 구하는 자에게만 비춘다. 나는 그들의 삶이 밝게 빛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