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최충언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날씨가 흐리거나 비라도 오는 날에는 몸만 헛헛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방금 전에 점심을 먹고서도 돌아서면 금세 허기가 지는 것처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서도 돌아서면 무언가 허전하여 채 오 분도 지나기 전에 책을 잡게 되니 말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 까닭에 장마철이면 나는 항상 여분의 책을 준비해 두곤 한다. 오늘 읽은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도 그 여분의 책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책이라는 것이 다 읽기 전에는 그 진가를 알기 여려울 때가 많은 물건인지라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는 허더분하다.
새벽에 비가 내려 자연스레 손이 간 이 책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태석 신부님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떠오르게 했다. 의사이면서 사제이셨던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오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기록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읽으며 나는 읽는 내내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이 책의 저자인 최충언님도 의사이다. 정확히 말하면 외과의사이다. 저자는 부산 송도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달동네에서 의사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그들과 정을 나누었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구호병원은 이름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자선병원입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돈 걱정 않고 치료받을 수 있고, 나는 돈 생각 않고 환자를 치료해줄 수 있었습니다. 8년 동안 구호병원에서 일하면서 수녀님들에게 배운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돈은 마귀의 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숙자들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가난의 향기'라며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6)
1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
IMF로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1998년 여름, 부산의 한 종합벼원에 근무했던 저자는 대책도 없이 사표를 내고 두 달을 빈둥거리다가 다시 찾은 직장이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구호병원이었다고 한다. 2006년에 그만둘 때까지 8년 동안을 구호병원의 외과 의사로 산 셈이다. 가족들에게서조차 외면당하는 노숙자와 가난한 달동네의 독거 노인들, 멸시와 천대 속에 살지만 돈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하는 외국인 근로자들, 저자는 의사로서 그들을 보듬고 상처를 치료하며, 그들의 삶을 가슴 아파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배부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것이다. 나누고 나누면 못할 일도 아닐 것인데 힘없는 민중들의 삶은 고달프고 서럽기만 하다. 요한 씨의 겨울나기를 지켜보면서 그의 어깨를 누르는 가난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웃으며 살아가야 하겠지?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봄이다. 요한 씨의 봄이 '말짱 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p.77)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의료기관도 문을 닫는 요즘,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도 거부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저자의 행동은 시쳇말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한 '미친 짓'이 없다면 이 사회는 또 어찌 될 것인가.
저자는 8년을 근무했던 구호병원에 사직서를 내고 후배와 동업으로 남부민의원을 개업했다고 한다. 사직을 했지만 여전히 구호병원의 외과 과장으로서 일주일에 두 번은 구호병원에서 수술도 하고 진료도 한다고 한다. 이어지는 2장은 그때의 기록이다.
2장. 삶의 바다가 물결치는 작은 병원
가난하여 사망진단서도 끊지 못하는 윤 할머니, 달걀 10개를 촌지로 쥐어주는 아주머니, 한센병으로 오그라든 손으로 점심이나 한 끼 사 먹으라며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는 김 할머니, 돈이 없어 무료 진료를 해주다가 환자 유인행위로 취급받던 이야기, 환자 부담금 3천 원이 부담이 되어 진료를 오지 못하는 달동네 사람들, 발가락으로 손가락을 이어 만든 이주노동자와의 우정 등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환자가 나간 뒤 마음이 편치 못해 복도로 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진찰한 환자가 산복도로를 건너 송도 윗길로 통하는 골목길을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망한 채 걸어가는 뒷모습을 손에 든 담배가 다 타들어가도록 바라보았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저녁 노을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달동네 작은 병원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p.138)
사람의 목숨보다 돈이 더 중한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내 살기도 바쁘다며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애써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요즘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도, 당신도 그렇게 살았던 지난 삶에 일말의 후회가 들지 않을까? 장마철에는 영혼마저 허기가 진다. 나는 몸의 허기를 달래주는 파전처럼, 또는 한 사발의 막걸리처럼 이 책을 읽었다. 영혼의 허기를 달래주는 파전처럼, 또는 막걸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