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속을 걷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래는 항상 현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밀려난다.  마치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사이에 두고 그리워하듯이.  어쩌면 우리 의식의 작은 틈일 수도 있는 이 간격을 메울 방법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미래를 바라볼 뿐 아무리 손을 길게 뻗어 잡으려해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도 그랬고, 죽음에 가까울 때도 그럴 것이다.  결국 미래는 우리 의식 속에서 자라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남녀는 환상 속의 미래를 좇는다.  금방이라도 장밋빛 미래를 움켜잡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현재는 너무도 짧은 찰나의 시간이므로.

 

결혼 전에 아내와 함께 본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일이라는 핑계로 서로에게 대한 잠깐의 무관심이 그럭저럭 용서되었고, 사는 지역이 달랐으니 만들어낼 핑계도 무궁무진한 것처럼 보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이어진 연인이었다.  마치 쾌쾌한 곰팡내가 날 정도의 긴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습관처럼 익숙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바심내며 급히 서둘러야 할 이유는 하나 둘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언젠가 아내의 권유로 <비포 선 라이즈>를 함께 보았고, 속편인 <비포 선셋>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는 결혼했다.

 

이동진의 영화 에세이 <필름 속을 걷다>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지금도 멜로 영화 베스트의 순위 안에 들 만한 영화들이 이 책에서는 여러 편 등장한다.  이 책의 1부인 "흔적을 찾다"에서 소개하는 영화는 <러브레터>, <비포 선셋>,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이터널 선샤인>, <러브 액츄얼리>이다.  제목만 들어도 어쩐지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2부 "리얼리티를 찾다"에서는 1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들이 소개된다.  <화양연화>, <행잉록의 소풍>,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니아 연대기>가 그것인데 작가는 영화 촬영지 곳곳을 누비며 몽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곳의 현실과 대면한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아름다운 시절로 부활하는 것은 언제나 '먼 훗날'이다.  현재 시제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과거 시제에서 추억을 발명함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자위한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언제나 과거라는 사실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절망이 있다.  영화 <화양 연화>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로 간 차우가 오래된 석조건물의 구멍에 대고 뭔가 속삭인 뒤 진흙으로 메우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그들의 사랑이 안타깝게 끝난 먼 훗날의 일이었다."    (p.121)

 

3부의 "시간을 찾다"는 <글루미 선데이>로 시작된다.  뒤이어 <쉰들러 리스트>, <티벳에서의 7년>, <장국영을 기억하다>, <베니스에서 죽다>가 차례로 소개된다.  작가는 '현실과 영화는 서로 어깨를 겯고 낭만을 희구한다.'고 썼다.  그러나 현실은 알 수 없는 시간대를 만났을 때 소리도 없이 파편처럼 부서진다.  너무도 허무하게.  쇠보다 더 단단하고, 노끈보다 더 질기게만 보였던 현실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모습은 아득하다.  그제서야 우리는 자신이 딛고 있던 현실을 되짚어보곤 한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만 내달리던 여름 햇살이 건물 기둥의 방해물을 만났을 때 투정을 부리듯 밝게 부서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기둥 뒷면의 그림자는 부서지는 햇살로 인해 비로소 그 형체를 드러낸다.

 

"휑한 축제의 장소들은 그저 축제의 꿈만을 꾸며 시간을 견디는 듯 느껴진다.  어쩌면 아센바흐도 그랬는지 모른다.  여행은 삶에서 축제같은 시기일 테니까.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여행지 베니스에서 아센바흐는 다시금 마음의 축제가 시작될 순간만을 고집스럽게 기다리며 두고 온 일상을 까무룩 잊는다.  그러나 아무리 감미로운 여행도 생활 자체일 수는 없고, 아무리 신나는 축제도 삶 전체일 수는 없다.  그게 아센바흐의 비극이었다."    (p.293)  

 

영화관을 나설 때마다 느꼈던 몽환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는 휴일 저녁의 느낌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몸은 이미 천 근 만 근이다.  그 경계를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하지 않은 일상에 금세 뒤섞이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본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과거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랑도 내내 그런 것이리라.  사랑 한가운데에 있는 연인은 언제나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잃은 연인은 언제나 과거로 회귀한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현재라는 시제가 언제나 빈 자리로 남아 있다.  그리고 '먼 훗날' 과거와 미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순백의 현재와 조우하는 날이 오면 하루는 마냥 길게 늘어진다.  하루를 마감하는 석양의 긴 그림자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