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 일기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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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에 대한 저 나름의 버릇이 한두 가지쯤 있게 마련이지만 내게도 그런 게 있다.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나다 싶은 것은 유명 작가의 신간이 나왔을 때, 신간을 읽기보다는 오히려 오래 전에 나왔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 읽는 버릇이 바로 그것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일약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최영미 시인은 적어도 1년에 한두 권의 책을 꾸준히 내왔던 듯하다.  그런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독자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그동안 시에는 무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시집만 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고집스런 나의 편견은 시인의 작품마저 멀리하게 만들었었나 보다.

 

1994년에 출판된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 때만 해도 시인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24살의 젊은 나이에 이혼한 그녀의 이력도 그랬고, 시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솔직함 - 예컨대 '자위 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마지막 섹스의 추억>, 사람들은 내가 이혼한 줄만 알지/몇번 했는지 모른다'<어떤 사기>, 녀석과 간음할 생각으로/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어떤 게릴라>, '아아 컴-퓨-터와 (X)할 수 있다면'-때문에 '도발적'이라거나 '트러블메이커'라는 세간의 비아냥이 줄곧 이어졌다.  게다가 시인의 이름이 알려질수록 회자되는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작가의 산문집 <시대의 우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와는 도통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책이다.  차분하고 편안한 문체와 여행지에서의 풀어진 모습과 자유로운 생각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최영미 시인이 이런 사람이었어?'하는 의문이 절로 들게 할 정도이다.  '최영미의 유럽 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작가가 두 차례에 걸친 유럽 여행-1995년 11월~12월, 그리고 1996년 4월~7월-을 하면서 틈틈이 쓴 일기를 정리해 도시별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작가답게 유럽의 미술관과 작품 감상이 주를 이루지만 흐린 날 언뜻언뜻 비치는 파란 하늘처럼 가벼운 일상들이 무늬를 더한다.

 

"기차를 타고 미지의 도시에 다가갈 때의 느낌은 서투른 연애의 메커니즘과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가 어느 한 장소의 혹은 한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머물 때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다가갈 때, 혹은 그것을 떠날 때인지도 모른다.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경험할 것인가, 아니면 환멸을 맛볼 것인가는 어느 정도 변덕스런 날씨나 그때그때 당신의 컨디션과 같은 우연의 폭력에 의해 좌우된다."    (p.149)

 

책을 읽고 이따금 블로그에 리뷰를 쓸 때마다 나는 '실패한 독자(讀者)'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읽은 작품의 문체가 화려하면 나도 그에 따라 화려해지고, 소박하고 정겨우면 또 그렇게 따라하고, 슬프고 외로우면 비슷한 감정으로 리뷰를 쓰기 때문이다.  독자의 감정이나 문체마저 작가의 그것을 따르게 한다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일단 성공했다고 평해도 무방하겠지만 책을 읽는 내 입장에서는 오롯이 내 의견을 고집하지 못하는 '실패한 독자'로 남게 마련이다.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약간의 우울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만큼 책이 내 맘에 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실패한 독자'가 되기를 꿈꿀 뿐 아니라 그런 책에 매료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빈다.  그날 그 뮌헨의 숲에서 날 소스라치게 했던 빗방울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현재에 툭, 내려앉기를.  어느날 문득 기억의 숲에서 솟아올라 그를 깨우기를......"    (p.144)

 

어쩌면 우리는 내가 저지른 지난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내게 용서를 비는 마음 밑바닥의 나를 대면하고 한바탕 울음과 함께 서로의 등을 토닥이고 나면 비로소 허기진 마음 한 곁에 희망의 싹이 움트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실패한 독자(讀者)'로 남아 작가를 닮은 리뷰 한 편을 끄적이겠지만 내일 또 다른 실패를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  실패한 독자로서.

 

"곧 나는 지리한 일상을 되찾았다.  이곳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잠시 맛보았던 새 세상, '거기'의 추억과 냄새도 차츰 희미해져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내가 앞으로도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내 속의 우울을 들여다보며 이 시대의 우울을 통과하기 위해서."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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