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고 싶은 동네
정진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부러웠다.  시골의 작은 마을이 책을 매개로 전 세계의 관광객들과 연결된다는 것이.  그것은 어쩌면 책 하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잘 보존된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후대에 와서 책과 함께 꽃을 피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변방이었던 우리 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기에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부러움과 약간의 시기심을 느껴야만 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다.  파주 출판단지가 그것인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책마을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또한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람 삼아 파주 출판단지를 가보았겠지만 그곳에는 몇몇 출판사가 들어서 있고, 각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아울렛과 갤러리, 그리고 외지인들을 유혹하는 북카페가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특색 있는 현대식 건물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역사의 숨결과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쾨쾨한 곰팡이 냄새는 맡을 수 없다.  결국 파주 출판단지는 출판사가 밀집한 소도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기에 역사와 문화 유산을 배경으로 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유럽의 책마을에 비하면 파주 출판단지는 다른 나라의 관광객을 유혹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뜻있는 작가들이 모여 강정마을에 책마을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제주 해군기지를 짓겠다는 바로 그 마을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극한 대립을 펼치고 있는 강정마을에 대규모 책마을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피폐해진 마음을 위로하겠다는 취지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유럽의 책마을과는 성격도 다르고 모양도 다를 것임에 분명하다.  아무튼 우리가 책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어떤 획기적인 유인책이 있어야만 하고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마을 주민 전체가 중심이 되어 책마을 잔치를 여는 스위스의 생 피에르 드 클라주를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 위치한 24곳의 책마을을 돌며 저자가 만난 책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형서점과 인터넷의 세파에 밀려났던 중고, 중소 서적상들이 책이 설 자리를 되찾으려는 이런 현상은 지방문화의 활력을 도모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내는 사회운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우리 유년기의 기억을 가장 강렬한 냄새로 물들인다.  아마 엄마 젖 냄새 다음으로 강렬하지 않을까.  본능을 자극하는 달콤하고 야만적인 젖 냄새가 가장 깊은 자연의 냄새라고 한다면, 책은 가장 해묵은 문명의 냄새를 풍긴다.  엄마 품에서 떨어져, 아니면 엄마 품 안에서도, 처음 책장을 넘길 때 고약하게 우리의 콧구멍을 파고들던 그 종이와 잉크 냄새......"    (p.9)

 

책마을을 소개하는 글은 가족 모두가 산보를 나온 듯 가볍고 경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스위스 마스 다주네에서 우리도 남과 북이 매년 단 하루라도 모여 책마을 잔치라도 벌일 수 있기를 소망기도 하고, 독일의 뷘스도르프에서는 아픈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1962년 세계 최초의 책마을을 선언하고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여온 영국의 헤이 온 와이에서 저자는 이제는 책을 주제로 한 관광촌의 전형이 된 헤이 온 와이를 아쉬워 하기도 한다.

 

"어쨌든 출판 관광으로 완전히 자족하는 이 마을에서 보낸 하루는 아주 잘 짜인 한 편의 '트릭' 속에 빠진 날이었다.  마주치던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맞잡으며, "헤이 온 와이를 즐기고 가시게"라고 덕담을 던지곤 했다.  제법 그럴싸한 책을 진열장에 내세운 '더 북 숍' 앞에서 입맛을 다시며 어정대고 있자니 점심을 차려준 식당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한마디 던졌다.  그런데 그 말이 참 걸작이었다.  "아니, 여기서 돈 다 쓰고 갈 참이구려!""    (p.289)

 

저자는 책마을을 돌며 시골의 그 작은 마을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며 우리의 현실을 시시때때로 생각하곤 한다.  한번은 '윌슨 런'이라는 16킬로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는 한 무리의 소녀들을 보며 '밤늦도록 학원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아무리 눈을 반짝여도 풀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입시 지옥의 가마솥 속에서 젊음을 불사르는 우리 딸들의 안쓰러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2007년 봄에서 2008년 초 겨울까지 유럽의 책마을을 돌며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했던 저자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현실을 생각할 때, 저자가 느꼈을 마지막 소회는 역시 진한 아쉬움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책이 잘되자면, 우선 책을 다루는 사람이 잘되어야 한다.  책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만들고 전하는 모든 사람이 중시되어야 한다.  엘리트도 적지 않게 투입된 요즘의 출판계에도, 일반이 생각하기에 책은 필자와 독자만 있고, 그 사이에 있는 편집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런 날이 언제일까.  중매쟁이들이 어느 출판사 다니는 총각이나 색싯감을 잡으려고 난리를 피우고, "책 만드는 놈한테 딸을 보내야 할 텐데......"라든가, "아무개 서점 아들 없소?"하면서 수소문하는 부모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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