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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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별을 바라본 사람들은 안다.

그 잠깐의 시간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나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을.  광대무변의 하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그 하찮음이 결코 싫지 않다는 것을.  일상에선 한없이 커졌던 자존심이 낮게 엎드려 먼지처럼 흩어진다는 것을.  그 겸손함이 결코 불쾌하거나 싫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작고 가벼워진 몸으로 수십 광년의 별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여행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밤하늘에 비하면 지구라는 이 별은 먼지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낯선 곳에서 한나절을 걷다 보면 크게만 보였던 내 자리와 내가 욕심내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작고 하찮은 것이었나 생각하곤 했다.  한순간에 다가오는 그 선명함은 어느 유명인의 설득으로도 바꿀 수 없었던 내 마음의 벽을 너무나 쉽게 앗아가버렸다.  별을 바라보며 아주 쉽게 내 존재를 잊을 수 있었듯, 여행을 하면서 내 욕심의 크기를 잴 수 있었다.  지구의 어느 곳에 있어도 하루 24시간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 어느 모난 시간이 나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던 것일까? 

 

이병률의 여행 에세이는 이번이 두번째다.  <끌림>에 이어 7년만에 나온 그의 책은 내가 견딘 세월만큼 조금은 편해졌고, 조금은 쉬워졌다.  세월은 그 속에 담겨진 경험만큼 나이들게 한다.  작가의 글은 이제 <끌림>에서 보이던 조금은 현학적이고 멋을 부리던 치기에선 조금쯤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독자들과 이만큼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쉽고 편한 글일수록 그 속에 담겨지는 의미는 크고 넓어지게 마련이니 참 이상한 일이다.  편한 사람일수록 그의 가슴은 넓고, 쉬운 글일수록 그 의미가 넓어지니 말이다.  어쩌면 '쉽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그 폭을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1# '심장이 시켰다'에서)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속설은 책에서 만큼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이병률의 산문집도 그렇다.  상업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 작가의 작품에서 세월은 무시할 수가 없는 법이다.  세월의 경과는 그의 글뿐만 아니라 사진에서도 보여진다.  그가 만난 사람들과 집과 거리와 산과 하늘들.  사진의 색은 선명하다.  눈에 확 띌 정도로.  그러나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다.  작고 소소한 것에 눈길이 가는 것은 세월의 변화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번은 루마니아에서 '쓸쓸히 아름답고, 쓸쓸히 눈부셨던 그 외진 길을 다시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야 했던 작가에게 왕복 요금을 다 내기엔 너무 많다는 이유로 편도 요금만 받았던 어느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좀 너무했다는 생각도, 나 같은 속물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머뭇머뭇거리느라 얼른 차에서 내리지도 못했다.  아저씨는 나를 내려놓고, 그리고 '너무 많은 그 무언가'를 내려놓고 그렇게 그곳을 떠났다."    (16# '쓸쓸히 왔던 길' 에서)

 

이병률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허허로움이 목까지 차오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것을 채울 수는 없다.  어쩌면 바닥까지 비우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뭔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이 고독인지, 사랑인지, 슬픔인지, 또는 알 수 없는 삶의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비틀거리다 일상의 바쁜 손놀림에서 멈칫하게 된다.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있는 건 슬픔의 색깔이다.  슬픔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그나마 지탱해왔다면 이해가 쉬울까.  슬픔의 냄새와 슬픔의 더께가 가득 들어찬 내 마음은 그래서 뚱뚱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정체가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슬픔이 맞다.  약기운 같은 슬픔.  말갛고 탁한, 흰색에 가까운 액체를 뚝뚝 흘려 모으다가 어느 날 그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를 말리는 일이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면 당신은 이해가 쉬울까."    (29#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달라고'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단어에 어깨동무를 하는 일이다.  새끼손가락을 걸며 이별하는 일이다.  더러는 내가 잘못했던 일을 떠올리며 눈발 날리는 거리에서 바람으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일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한 치쯤 낮아진 자존심과, 한 뼘쯤 두꺼워진 '낯 두꺼움'이 있다.  친한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여행 중'이라고, '그래서 널 만날 수 없다고 당당히 대답하고 싶다.  낯선 이국땅에서 '몹시 외롭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외로움으로 너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고 싶다.  이병률의 산문집을 읽으면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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