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간은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워낙 가물었던 터라
바람에 실려오는 습기도 없으니
아침에 운동을 하는 나로서는
이보다 반가운 일도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청명한 하늘을 보며
산을 오르는데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는
초로의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때마침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등줄기에 흐른 땀을 식혀주었다.
그 바람이 반가웠는지
아주머니가 소녀처럼 감탄을 했다.
"어머! 어쩜, 가을날씨 같아요."
그러자 옆에서 걷던 아저씨가
"지금이 보릿가을이지.
보리를 수확할 무렵이면 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
시골 사람들은 다들 이 때를 보릿가을이라고
불렀어." 한다.
나는 속으로
'아, 보릿가을. 참 좋은 말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아저씨가 지어낸 말이려니 하고 짐작했었다.
산의 정상 부근에서는
수많은 떡갈나무와 은사시나무의 우듬지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사전에서 '보릿가을'을 찾아 보았다.
'보리가 익어서 거둘 만하게 된 때'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어린 나이도 아닌데
나는 왜 여태 이 좋은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일까?
책에서 읽어 알게 된 '인디언 썸머'가
생각났다. 우리말도 아닌 그 단어는
잘도 기억하면서 정작 너무나 고운
우리말은 몰랐었다.
'보릿가을'
입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참 좋은 말이다.
오늘은 비록 햇볕은 따가웠지만
한낮에도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