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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일삼아 먹는 행위를 '허식(虛食)'이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현대인은 영양분이 부족하여 먹는 '필요식(必要食)' 외에 입이 심심하여 습관처럼 먹는 병적인 증세가 누구에게나 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럴 때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 유행처럼 번지는 이런 행위가 비단 음식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요즘 출간되는 서적을 보면 그런 현상이 글에서도 두드러지는 듯하다. 지나친 묘사(특히 심리묘사), 과장된 비유, 불필요한 설명, 비슷한 내용의 반복 등 흠을 잡자면 끝도 없다. 글의 낭비요, 지식의 과한 주입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식을 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몸이 나른해지듯 이러한 글을 읽고 나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개운치 않은 감정의 찌꺼기만 남는다. 달착지근한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음식 뿐 아니라 글에서도 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얕은 글에 익숙해져가는 듯하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몸에도 좋지 않고 정신에도 좋지 않은 얕은 맛, 얕은 글에 탐닉하는 것일까?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뿌리가 허한 탓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몸의 뿌리가 튼실하면 자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으로 족하고, 정신의 뿌리가 튼실하면 맑고 간결하지만 깊은 사색이 필요한 글을 즐겨 읽게 된다. '그래!. 맞아.'라고 외칠 수 있는 깊은 글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도 다 이런 까닭이다.
지허스님의 <선방일기>는 그런 책이다.
탁 트인 마음골에 맑고 푸른 솔바람이라도 불 듯한, 청아한 풍경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뜨는 묏새처럼 도무지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는 단아한 글이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처럼 글은 처음부터 뼈대만으로 전체를 이끌고 있다. 이 책은 1973년 신동아에 연재되었던 글로 1993년과 2000년에 출간된 적이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상원사(上院寺)’로 모여든 스님들의 선방생활 기록이다. 저자인 지허스님은 구전에 의하면 서울대를 졸업하고 탄허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고 한다. 1962년~1963년 사이 1년간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서 20여리 떨어진 토굴에서 수행했고 이때의 기록이 《대한불교》에 연재된 적이 있고 1975년 입적했다는 진술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인연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나는 지허스님이 토굴에서 수행하셨다는 정암사의 심적암을 방문했었고(심적암은 일반인의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지금도 그곳에서 수행하시는 스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의 수마노탑을 뒤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한동안 올라가다 보면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가득한, 너무나 조용하고 마음조차 고요해지는 심적암이 나타난다. 그 별천지와 같은 수행터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책은 오대산에 있는 고찰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나기 위해 방문했던 지허스님이 결제일을 보름 앞둔 시월 일일부터 이듬해 그 곳을 나서기까지의 석달 보름간의 선방생활을 솔직담백하게 적은 일기 형식의 글로서 모두 2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상원사행,산사의 김장 울력과 겨울채비, 결제, 소임, 선방의 생태, 선객의 운명, 포살, 선방의 풍속, 유물과 유심의 논쟁, 본능과 선객, '올깨끼'와 '늦깨끼',식욕의 배리, 화두, 병든 스님, 용맹정진, 마음의 병이 깊이 든 스님, 별식의 막간, 세모, 선객의 고독, 스님의 위선,열반에 이르는 길, 해제 그리고 회자정리 등의 소제목은 구도자로서의 솔직한 고민과 일상을 엿보게 한다.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이자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지만, 운명은 자기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P.38)
이 얇은 한 권의 책이 가슴 깊이 쌓아둔 노여움과 욕망을 내려놓게 한다. 차갑지만 맑고 신선한 겨울 아침을 만나는 기분이라고 할까. 싸한 냉기가 죽비처럼 등짝을 내려치는 듯하다. 해서, 어지러운 마음이 한결차분해지고 정갈해진 기분이다. 안거는 여름과 겨울 각각 3개월씩 진행되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죽비를 신호로 간단히 3배의 예를 올린 뒤 화두를 들고 선(禪)에 들어가는 불가수행의 한 방식이지만 이런 스님들의 일상을 치열하게 묘사한 <선방일기>는 사부대중인 나의 마음에 비수로 꽂힌다.
지허스님이 풀어낸 수행 이면의 살가운 이야기들은 짠한 느낌과 함께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뭔가 결심이 필요하거나 확신이 필요할 때마다 들춰볼만한 책이다. '허식'(虛食)과 '허독'(虛讀)에 찌든 현대인에게 이 책은 '치유의 서(書)'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