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사랑하다
쓰지 히토나리 외 지음, 양억관 외 옮김 / 동방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고속도로 휴게소나 기타의 공공장소에서 공중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체험은 낙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원시인에 의해 그려진 동굴벽화도 낙서의 일종이고 화장실 뿐만 아니라 유명 관광지의 곳곳에도 낙서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화장실의 낙서는 유독 눈길을 끈다.  통계에 의하면 여자들의 경우 감정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룬 반면, 남자들은 성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가령 여자화장실의 경우,
A: 여자친구 있는 남자를 뺏어서 사귀고 있어요. 저 나쁜 사람인가요? 그렇지만, 정말 너무 사랑한걸요…
B: 응, 너 나쁜 애야.
이와 같은 화장실 낙서로만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다면 '성욕'과 '분노'라 말할 수도 있겠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어쩌면 이것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화장실은 가정집이 되었든, 공중화장실이 되었든 개인의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동시에 가장 솔직한 자아를 만나는 은밀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익명성'과 '해방성'을 만끽할 수 있는 제한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화장실 낙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내밀한 공간에서의 낙서이다 보니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계 각국의 낙서는 유사한 공통점을 보인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발표한 화장실 낙서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여성의 경우 가장 많은 화장실 낙서는 섹스,피임,임신중절,여성권리가 주를 이루는 반면 남성의 경우는 55%가 정치문제이며 파괴적이고 증오에 가득 찬 낙서들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내용과는 하등 관련도 없는 화장실 낙서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펼쳐놓는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연애'는 그 표출하는 방식만 다를 뿐, 개인의 내밀한 욕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화장실 낙서와 연애는 그 밑바탕에 깔린 기저심리가 유사하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 책은 <냉정과 열정 사이>의 저자인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연애 담론이다.  동일한 주제에 대해 츠지 히토나리가 운을 떼면 에쿠니 가오리가 자신의 의견을 더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는 보기 드문 형식의 산문집이다.  글의 처음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절대적인 형태가 존재할 수 없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남의 집 정원을 엿보는 듯한 가벼운 기분으로 읽어줄 것을 저자는 주문하고 있다.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다시 복학을 하였을 때 가깝게 지내던 초등학교 여자 친구가 결혼을 했었다.  서로가 이성적으로 가까웠던 관계는 아니고 심심할 때면 부담없이 전화하고 차 한 잔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그런 동성과 같은 친구였다.  그 친구가 결혼하고 몇 개월이 흘렀을 무렵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신혼의 단꿈에 흠뻑 취해있을 시기인데 만나자는 전갈은 의외였다.  어찌어찌 약속을 잡고 어느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던 듯하다.

그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긴즉슨, 자신의 남편이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는지라 다른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운전면허나 따라고 학원에 등록을 시켰었단다.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고 다음날부터 남편은 교통비와 약간의 용돈을 받아 매일 학원으로 출근했고,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이 지났을 무렵 남편의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기 시작했단다.  그녀가 주는 용돈으로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보낼 수 있는 넉넉한 금액이 아니었기에 그 궁금증은 더해갔다고 했다.  가뜩이나 신혼이 아니었던가!  남편이 그 학원에 다니는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당시 결혼도 하지 않았던 내게 어찌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정적 끌림'과 '사랑'은 분명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길을 가다가 멋진 이성을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머물렀던 경험, 결혼식 이후의 피로연 자리에서 만났던 이성과의 짧은 만남 등등을 모두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너도 그런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다만 지속되는 시간이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그때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설령 가벼운 만남이 사랑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을 방법은 딱히 없지 않겠냐며 섯부른 판단으로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연애시절 친구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만났던 한 남자로 인해 1주일여를 가슴앓이 했던 경험을 내게 들려주며 남편을 믿고 조금 더 기다려 보겠노라고 하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사랑을 하고 불꽃같은 연애를 경험하게 된다.  사람을 잘 믿지 않아 소설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츠지 히토나리와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이기도 한 에쿠니 가오리의 솔직 담백한 연애 담론은 도덕적 정당성을 다루는 정통 사랑학이 아닌 누구나 겪는 현재 진행형의 연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건설적이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죠.  연애는 개념의 파괴니까.  인생을 건설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랑과는 다른 것이죠.  그 점이 재미있지 않나요.  연애에 빠지면 옷깃을 여미고 끝까지 빠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랑을 지나 죽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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