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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언저리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답답한 일이겠지만.
누군가의 생각장에 한발 들여놓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 에너지장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내 생각이 일순 사라질 것만 같은 공포. 시답잖은 '나'일지언정 마지막까지 무언가 잡고 있어야만 그래도 안심할 것 같은 어이없음. 마치 프로이트와 푸르스트를 혼동하는 것처럼. 그것을 에고(ego)라고 불러야 할까? 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단한 껍질. 나는 '껍데기는 가라!' 외쳤던 어느 시인이 부럽다.
언젠가 대학 동기 A는 진리에도 유행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누군가 풀어 놓은 사색의 편린을 그 생각의 원천, 한 점의 순간으로 되짚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깨진 달걀에 그만큼의 에너지를 주입하여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비가역성의 원리처럼 우리는 매번 생각의 빅뱅을 경험하지만 그 파편을 모두 모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오직 펼쳐진 생각의 현재만 볼 뿐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광활한 우주를 보며 겨자씨만한 원시 우주를 동경하듯이.
그는 내게 말했다. 진리는 그저 갤러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그림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정혜윤의 글은 수면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은 아름답지만 결코 태양은 보지 못한다. 나는 그 시절의 친구를 경멸했다. 개똥철학이나 읊는 몽상가라고. 그러나 이제는 알 것같다. 자신의 발가벗은 자아를 방어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츠바이크처럼 자살을 선택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그래서 우리는 늘 언저리에서 맴돈다.
작은 기온 변화에도 접착력을 잃고 틈이 벌어진, 켜켜이 먼지 쌓인 실리콘의 비애를 세월이라 했다. 그 작은 틈새로 잊혀진 세월이 스며들어 내 생각과 어색한 악수를 나누는 사이 나는 '공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제목이 <지식인의 서재>였던가. 그 책에 언급된 사람이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없지만 그들이 추천한 책에는 역사 서적이 많다는 사실에 저으기 놀랐었다. 그들도 나처럼 잊혀진 세월과 조우하며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았다. 진중권,정이현,공지영,김탁환,임순례,은희경,이진경,변영주,신경숙,문소리,박노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하고 머리를 또렷또렷 굴려보지만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결론. 그들은 가끔 내가 한번쯤 읽어보았던 책의 제목을 언급하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요지부동. 그것을 에고라고,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나는 덫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덫이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복잡하고 신비로운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러므로 사람과 책이 만나는 지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힌트를 준다. 왜냐하면 책이란 다름아닌 사랑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결국 어떤 책을 사랑하느냐는 그 사람의 속성, 그 사람의 자존감, 그 사람의 희망, 그 사람의 꿈꾸는 미래,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사람의 포용력,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이다."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