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행복한마음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첫날밤에도 마치 점호 나팔을 들은 듯 밤 아홉 시에 취침하여 아침 일곱 시에 기상한 사람을 아는가?  또는 음식을 선택하는 데 잇어 머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혀와 밥통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을 아는가?  둘 다 모른다면 혹시 면접시험에서 회사 방침이 종업원에게 넥타이를 꼭 매야 한다고 강요하면 자신은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사람을 아는가? 

물론 내 얘기가 아니다.
나는 그만한 용기도 없고, 내 아들은 방학 동안 놀러 다니며 삼겹살만 구워먹었으니 2학기 중간고사에는 '어떻게 하면 삼겹살을 맛있게 구울 수 있을까?'와 같은 문제만 출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기적인 아빠도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회사에서 짬짬이 읽으며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본의 아니게 옆 동료들의 눈총을 사야만 했다.  서두의 글은 이 책의 저자인 전시륜의 행복론이다.  자명종을 틀어놓지 않기,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기, 넥타이를 매지 않기.  단 세 가지의 원칙이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난 한 소년을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게 해주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던 무명의 철학자 전시륜의 행복한 삶을 담고 있다.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삶.  그의 삶의 흔적에는 곳곳에서 유머와 재치, 기발한 상상력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용기가 넘쳐난다. 1932년 충청북도 주덕에서 태어나 1998년에 작고하기까지 66년의 길지 않은 그의 삶이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특별한 이력도 없는 무명인인 그가 일면식도 없는 내게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깊은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삶은 기본적으로 따분하고 괴로운 일의 연속이라고 굳게 믿었던 나의 생각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삶은 행복한 파티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해준 것이다.

평생의 소원이 모국어로 된 자신의 책 한 권을 세상에 펴내는 일이었다는 작가는 췌장염으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젊은 날 한국을 떠나 임종 때까지 외국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유쾌한 행복론을 한번이라도 접한 독자라면 지옥에 가서라도 그를 다시 삶의 현장으로 끌고 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2탄, 3탄 연속해서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시륜의 유머는 그야말로 발군이다.
『나를 부르는 숲』이나 『발칙한 유럽 산책』의, ‘웃기는 작가’, 빌 브라이슨이 울고 갈 정도다. 1957년 그는 『마산일보』에 구혼광고를 낸 바 있다. 25살의 전시륜이 마산 육군군의학교 하사관으로 있을 때였다. 장교도 아닌 사병이 신문에 구혼광고를 낼 정도로 전시륜은 배짱이 두둑한 사내였다. 시골에 칠순이 넘는 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신은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며, 미국 유학 동안 아버지를 모실 용의가 있는 여자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연을 광고에 적은 뒤 응모자격을 ‘만 19세 이상, 만 30세 미만의 대한민국 처녀 및 미망인’이라고 썼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슨 꿍꿍이 속셈이냐고 따져 묻기 전에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여자들이 미망인이 되었다. 그 중에는 착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많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 앞길은 막막했다. 그들이 내 광고를 읽었을 때 인습의 틀과 굴레를 차버리고 용기를 얻어서 나를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진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스스로 인간 가치를 50퍼센트로 할인하고, 나의 변변치 못한 사람됨을 용서해주고, 진지한 논의를 하자고 응해올 것이 아닌가. 나는 구둣방 머슴애처럼 건전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가치 없는 새 고무신보다는 튼튼한 헌 가죽 구두를 택할 용의가 언제든지 있었다.’  (P.159)

삶이 오롯이 내 것이었던 어느 행복한 철학자의 유서로 남은 이 한 권의 책이 가슴 벅차도록 나를 달뜨게 한다. 
"저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결혼이 거액의 배당금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혼생활이란 항상 즐거움이요, 언제나 로맨스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사실상 결혼했다고 해서 행복이 정장을 입고 우리집을 찾아와 큰절을 올릴 것이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행복은 문자 그대로 요행이며 복입니다.  행복은 삶이 의당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우연히 얻게 되는 선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삶은 공정합니다.  만족스러운 생활이 요구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따뜻한 화로 옆에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커피를 마시고, 좋아라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바로 행복의 그림이 아니겠습니까."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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