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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날이 무덥다.
아침부터 말매미 목이 쉬도록 울고, 등산로 초입에는 한삼덩굴이 지천이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바야흐로 성하(盛夏)!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을 읽었다.
쌀알 같은 시어를 고르 듯, 문장 속 쭉정이를 한평생 고르셨을 지난한 삶이었다. 어두운 세상에 시인이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냐. 쭉정이 없는 알곡으로 하얀 쌀밥을 짓는 일은 또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 박경리 선생은 그렇게 사셨다. 시인의 삶과 시가 겉도는 것쯤이야 요즘 세상에 책잡힐 짓도 아니라지만 시인의 글줄이 아귀에 맞지 않아 자신의 삶마저 휘청거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선생의 시는 땀에 젖은 모시 적삼처럼 꾸미지 않은 소박함이요, 삶과 시를 구분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그 가치가 있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대학시절, 문학 지망생이었던 한 친구는 학사주점의 흐릿한 조명 아래서 술기운을 빌어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문학은 없어. 체면을 중시하는 이 문화가 지속되는 한 그 누구도 가면을 벗기 어려워. 그래서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거야. 나도 수차례 이 가면을 벗어보려 했지만 끝내 되지 않더군. 한국인에게 가장 무거운 것은 체면이야. 도저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던져버릴 수가 없어. 그만큼 집요하다는 얘기지." 친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그날 친구를 부축하여 자취방으로 향할 때 그의 어깨에 매달린 체면의 무게를 절감했다. 어쩌면 그 무게에 절망했는지도 모른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을 읽으며 '아! 죽음을 목전에 둔 노작가도 한평생 체면의 굴레에, 그 무게에 힘겨워했구나'하고 느꼈다. 선생이 살았던 80여년의 세월 동안 체면에 짓눌린 삶은 누런 진물이 되어 옹이처럼 굳어졌겠구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홀가분하랴. 그 질긴 체면의 무게에 욕심을 한겹 더하여 더욱 힘겨웠을 젊은 시절의 삶. 그럼에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가식이 없는 선생의 시는 바람처럼 맑고 투명하다. 속살이 다 비칠듯한 그 싯구 구절구절이 내게는 왜 이다지도 아리게 다가오는지... 그 가벼움이 내 가식의 살갗을 얼마나 야무지게 도려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