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 알래스카와 참사람들에 대한 기억
이레이그루크 지음, 김훈 옮김 / 문학의숲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한참 지나고 나면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연히 깨닫게 되고, '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구나!'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곤 한다.  그럴 때, 내가 비록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인생 전반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서늘한 경외감에 휩싸이곤 한다. 

북부 알래스카, 날짜 변경선에서 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코체부에 해안선에서 태어난 저자 이레이그루크는 어머니를 따라 신흥 도시인 놈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외가 쪽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가 전통적인 이누피아트 족의 방식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  아사(餓死) 직전에 놓였던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알래스카주의 하원의원이 되었고, 알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정신없이 살았던 저자는 자신의 선조들이 1만 년 동안 이룩한 전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에스키모의 삶과 전통, 그리고 사라져 가는 그들의 얼과 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알래스카의 겨울 속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레이그루크는 수탈하는 미국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본토 인디언들의 몰락 과정을 자각하게 된다.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하원의원이 되었다.  저자와 그를 돕는 많은 사람의 부단한 노력으로 알래스카 원주민 토지청구권 타결 법안에 닉슨 대통령이 서명하였다. 한낱 보잘 것 없이 버려졌던 아이가 알래스카 전체 인디언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위대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피를 타고 흐르는 가족간의 사랑과 자연에 대한 경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여 년 동안 우리 자신을 다스려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위임 통치한 이들은 우리를 고유한 민족으로 만들어준 것들의 정수, 곧 우리의 언어와 이름, 종교, 관습, 가치관을 공격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려 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규칙과 법을 만들었다."  (P.201)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그들에게는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냥 땅은 그곳에 사는 인간과 동식물들이 함께 사용하는 신의 선물 같은 거였다. 그런데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이 들어와서 그 땅을 헐값에 사고 팔았고 그 땅이 미국령이 된 이후에는 저자를 비롯한 의식 있는 원주민 공동체가 무려 10여년 동안이나 힘겹게 토지반환청구소송까지 하며 그 땅의 일부를 겨우 찾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거세게 들이닥친 미국의 화폐 경제와 물질문명 속에서 너무도 많은 원주민들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가정이 해체되거나 홈리스가 되거나 혹은 자살해 버렸다.  서구 열강의 지배 방식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물질문명의 달콤함으로 유혹하여 원주민의 욕심을 자극하고 그런 욕심은 그들로 하여금 뿔뿔이 흩어져 태초부터 지녀왔던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게 하는가 하면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실시된 사상 개조는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마저 저급한 것, 또는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원주민들을 이렇게 허수아비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면 그들을 영원히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 된다.  이런 지배 방식이 어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프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어쩌면 그들의 힘이 미치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자행되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 아닌가.  독립국가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의 방식이 여전히 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해 겨울, 놈의 해변에서 나는 강렬한 통찰의 순간을 경험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세상에서 존재가 가장 희미한 지역들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인간 고통의 전모를 한순간에 통찰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정체성과 문화와 인간관계의 본질에 관한, 세계 전역의 국가들이 자국내 소수민족들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써먹었던 조직적인 방법들(특히 종교와 교육 과정을 통해서 자기네 것을 주입하는 방법)에 관한 깊은 진실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P.278)

인간에게 안락함이란 마약과 같은 것이다.  물질문명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한 사람들은 무가력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전통으로 내려오는 그 모든 가치들에 대한 집단적 가치부정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 우리가 의식할 정도로 서서히 진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수한 외침을 받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잘 드러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사고방식이 원주민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얻어낸 지식을 몰아냈는가 알았다.  옛 지식이 공동체 의식이나 공동의 복지에 대한 헌신 같은 요소들과 더불어 사라지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차 자기네 언어나 문화와 단절되어가고 가족관계도 날로 약화되어가서 결국은 낱낱이 동떨어진 섬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P.321) 

한글보다는 영어로 된 간판이 난무하는 거리.  오렌지보다는 '어린지'를 강요하는 사회.  우리는 그것을 진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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