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초등 저학년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갖게 되지만 그 바람과는 반대로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더 안 좋아지기만 할 뿐 나아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즈음이면 부모는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던 문제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서둘러 정신과 병원을 찾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옛날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부모들은 여전히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한 집 건너 자신의 아이와 닮은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된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서 다른 아이보다 나은 장점을 하나둘 발견하려 애쓰게 되고 그동안 크게만 보였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이것만은 00보다 나으니 다행이야’하고 자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러한 아이들이 늘어난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육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땅으로부터 얻게 되고,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토양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 토양을 상실한 가정이 너무도 많다.  45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토양이 형성되었듯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정신적 토양은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 토양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영혼의 자양분을 섭취해 왔었다.

불과 1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경사회의 특성상 내 부모가 아닌 공동체의 다른 이웃도 그와 같은 정신적 토양을 후대에 잘 전달해주었지만, 핵가족화 되고 이웃을 상실한 지금은 오직 부모만이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맞벌이에 내몰린 현대의 부모는 전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방관자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지금의 아이들은 그들이 딛고 살아가야 할 정신적 토양을 상실한 것이다.  땅이 없는데 어찌 꽃을 피울 것이며,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성장해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시계에 맞춰 속성으로 기를 때 지구 환경의 오염을 피할 수 없듯이 아이들을 어른들의 욕심에 맞춰 빠르게 성장시키다 보면 영혼의 토양이 무참히 오염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흐르는 자연의 시간마저 잊은지 오래다.

어제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한 명이 가출을 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며 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통렬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성적의 순위가 아닌 생존의 문제에 점차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조금 더 진행된다면 대부분의 부모가 성적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이들의 생존을 염려하게 될 날이 도래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려는 기성세대에게 돌이라도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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