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 이해인 산문집
이해인 지음, 황규백 그림 / 샘터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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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나도 모르게 사르르 단잠에 빠져들 것만 같은 사람이 있다.
눈빛의 대화만으로도 긴 이야기를 아주 오래도록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네 마음과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강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해인 수녀님의 책은 참 오랜만이다.
반가운 마음에 선뜻 주문을 하고 택배를 통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었다.  언젠가 <민들레 영토>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때만 해도 수녀님의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맑고 담백하게 쓰여진 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이게 무슨 그림이야! 나도 이런 건 그릴 수 있겠다!” 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시는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차츰 이해인 수녀님의 글이 좋아졌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책을 펼치면 책 갈피마다 향기가 피어나는 듯하고, 투명한 영혼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다(海)와 논어의 인(仁)을 좋아해서 해인이라는 필명을 지었다는 클라우디아 수녀님.  암 투병을 하면서 고통도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에 가슴이 짠하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됐으며 1장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일상의 나날들’에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람, 계절의 변화와 기억 등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잡아낸 생각들을 수도자가 아닌 일반인의 감성으로 담담히 적고 있다. 법정 스님과 오랫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담은 ’스님의 편지’에서는 다정한 미소를, ’따뜻한 절밥 자비의 밥상’, 김용택 시인에게 보내는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등에서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가 하면, ’어머니를 기억하는 행복’에서는 어머니를 그리는 딸의 그리움이 읽는 이의 가슴에 진한 슬픔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2장 ’어디엘 가도 네가 있네-우정일기’에는 수녀가 10여 년간 쓰고 지우며 쌓아 온 우정에 대한 단상 60여 편이 담겨 있다. 힘든 때일수록 서로 사랑하면 된다고 서로 격려해준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이 오롯이 배어있다.

3장 ’사계절의 정원-수도원 일기’에는 이해인 수녀가 2010년 한 해 동안 수도원의 일상을 적어 내려간 일기가 담겨 있다. 치료의 고통을 견디는 힘든 시간들의 기록, 인사발령이나 죽음의 길로 떠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일의 소소한 행복감 등을 읽노라면 수녀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닜다.

4장 ’누군가를 위한 기도-기도일기’에는 군인들을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교사를 위한 기도 등 주제를 가진 기도일기가 수록됐고, 5장 ’시간의 마디에서-성서묵상일기’에는 이해인 수녀가 1998년~1999년 두 해에 걸쳐 매일 적어 나간 묵상일기를 발췌해 실었다.

마지막 6장 ’그리움은 꽃이 되어-추모일기’에는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우리 시대의 어른들과 수녀가 맺은 우정과 그리움, 애틋함의 무늬가 새겨진 추모의 글들이 담겨 있다.
피천득, 김수환, 김점선, 장영희, 김형모(’십대들의 쪽지’ 발행인), 법정, 이태석, 박완서씨 등. "미리 생각하는 이별은 오늘의 길을 더 열심히 가게 한다"고 애써 슬픔을 감추며 상실의 아픔을 담담히 견디는 모습이 더욱 애잔하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유난히 좋아하여 기도처럼 <서시>를 외우며 살았고, 어쩌면 그 시의 영향으로 수도자의 삶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견뎌왔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하는 수녀님의 고운 마음결이 글자 하나하나마다 하얀 벚꽃으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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