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문체는 독자의 의식 세계에 개입하여 명사만 남기고 모든 불필요한 조사와 형용사를 가지치기 하는, 텍스트에서는 그 모든 것을 읽고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이를테면 거대한 글자 퍼즐에서 명사만 떼어놓은 듯한 기묘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그만의 사고방식, 그 독특함이 보통의 일반 독자나 그저 그런 작가의 식상한 표현과 구별되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갖게 한다.  가끔은 차갑다거나 시니컬한 면도 보이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책의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독자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독자의 속성상 텍스트와의 끝없는 공감이나 교감의 욕심이 책의 내용을 일정 부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기에 독자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작가의 배려이자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으로 인해 책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한 책의 무리 속에서도 부표처럼 그의 책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진 이 책에서 작가는 통념적인 전기(傳記 : Biography) 문학에 대해 반기를 든다.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투사체이자 소설 속의 화자인 ’나’는 ’이기적이고 공감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실연을 당한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비트게슈타인의 책에 나오는  ’공감’ 이라는 말에 이끌려 자신만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나’의 전기는 그 대상의 선택에서부터 기존의 전기와 구별된다.   유명인이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전기문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논리에 저항한다.  시대적 배경이나 문서로 남아있는 모든 자료가 사실일지라도 전기를 읽는 독자가(또는 글을 쓰는 작가라 할지라도) 주인공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품 속의 ’나’는 죽어서 화석이 된 2차원적 삶의 전기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 이사벨 로저스의 삶을 기록한다.  '나'는그녀의 애인이라는 자격으로 그녀의 삶의 영역 안으로 안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한 사건이 주인공의 삶의 방식이나 자아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식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통념적 전기가 아닌, 어쩌면 손톱을 물어뜯는 작은 습관이 한 인간의 삶에 있어 일정한 시기를 지배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작품 속의 '나'는 굳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하게 아는 것처럼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잘 안다는 완벽한 상징을 추구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다. 결국 다른 누군가를 속속들이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의 우회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사벨의 정신 기능 가운데는 공감이라는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우리의 차이를 존중하자는 슬픈 결정으로 만족해야 하는 영역들이 있었다.  왜 슬프냐고? 차이를 존중한다고 으스대며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솔직히 말하면 논리적으로 존중할 수 없는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  (P.327)     

어느 날 알랭 드 보통은 하느님께 이런 메일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하느님, 내가 알고 싶은 이 사람에 대한 모든 자료를 메일로 보내주세요.  탄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사진과 메모에서부터 일기나 문서 등 살아가는 동안 기록한 모든 것들과 내가 알아야 할 세세한 성격과 습관들.  혹시 간과할지 모르는 특이 사항도 별첨으로 보내주세요.  혹시 자료가 너무 많다면 알집으로 파일을 압축하여 보내주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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