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리뷰를 씀에 앞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기 블로거도 아니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이런 책을 읽으면 전보다 조금은 더 솔직해져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곤 한다.

이야기 "하나"
내게는 올해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아들이 한 명 있다.
곧 생일이 다가오는데 아들 녀석은 받고 싶은 선물을 여즉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일에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까닭에 나는 매일 저녁에 한 번씩 전화 통화를 하게 되는데, 어제는 아들 녀석이 생일 선물을 고르는 기준을 적었다며 들려주었다.  
그것을 굳이 종이에 적은 이유는 성당과 영어 학원을 같이 다니는 여자 친구와 상의하기 위해서란다.  그 기준은 이랬다.  
1.서점에서 살 수 있나?  
2.인터넷에서 살 수 있나?(아들이 불러준 것을 그대로 옮기니 어법에 안 맞는다)  
3.탐험(주일 미사 시간에 아들 녀석은 여자 친구와 성당 주변을 탐험한다)에 얼마나 이익을 주나? 
4.무슨 용도인가? 의 네 가지 기준에 의해 풍력 발전기, 친환경 건전지, 클린 워터, 쏠라 사이언스, 자가 발전기, 감자 시계, 전자석 발전기 중 하나를 고를 예정이란다.  
아들 녀석은 성당을 다닌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다.  나와 아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천주교 신자인지라 더 이른 나이에 세례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종교 문제만큼은 아들의 선택에 맡기고 싶었다.  
아들이 성장하여 다른 종교를 선택하든 아니면 비종교인으로 남든 그것은 아들의 몫이다.  아들은 그렇게 성당을 그저 여자 친구와 놀기 위해 다닌다.
종교가 필요한 나이가 되면 아들은 선물을 고르듯 그 기준을 세워 종교를 선택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들의 몫이며 아들의 생각에 달려 있다.

이야기 "둘"
나는 직장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돈을 받는 것도 아니요, 때로는 내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나는 왜 그 일을 하려고 작정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경쟁과 서열을 부추김으로써 그들의 지적 갈망은 극대화되고 더불어 나에 대한 의존도 강화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나는 힘들이지 않고 권위를 얻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회봉사라는 포장으로 나 자신을 미화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 <네이키드 런치>에서 마약 중개상이 마약 구매자를 중독의 상태로 이끄는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약 구매자에게 마약의 양을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중독에 이르게 한 후, 그 양을 점차 줄이면 그들의 몸과 마음은 중개상의 소유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득권의 지배 방식도 동일하다.  어려서부터 돈에 대한 의존성을 중독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쉽게 지배할 수 있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속셈을 숨길 수 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돈의 필요성과 돈의 효용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어온 아이들은 마약보다 더 지독한 중독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돈을 지배하기보다는 돈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쉽게 종속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도 모른 채 단순히 가난을 피하기 위해 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속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룬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돈의 달콤함을 가르치지 않는다.  실체도 모르고 집착하는 행위는 노예와 같은 종속만 있을뿐이지 실제적 지배는 일어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난한 아이일수록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갖고 싶은 돈이 건강 악화로 쉽게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탓이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운동을 강조하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소중한 것, 즉 자신의 건강과 가족간의 사랑, 이웃간의 배려 등이 기반이 되지 않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교육이라는 수단은 충실한 자본주의 노예를 양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아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려고 노력하면서도 정작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노력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나를 믿고 따르는 아이들에게 나의 위선을 고백할 용기는 없지만 내 양심은 나를 모질게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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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0 0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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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2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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