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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글을 쓴다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머리와 팔의 거리를 좁히는 일일 게다.
나의 글은 언제나 아귀가 맞지 않아 울퉁불퉁 거칠기 짝이 없어, 읽을 때마다 입 안에 흙모래가 씹히는듯 서걱거린다.
내가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작가 자신의 유년기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은 후였다.
그 전에도 작가의 작품을 더러 읽었었지만 작가의 글에서는 잘 벼린 칼의 시퍼런 날카로움도, 무릎을 칠만큼 독특함도 찾지 못했었다. 그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한 밋밋함이, 옆집 아줌마의 긴 사설에서도 족히 들었음직한 이야기들이 작가를 오래 기억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이 자연스러움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고, 나는 그만큼 어렸었다.
화선지에 번지는 푸른 잉크처럼 생각의 색깔이 원고지에 자연스레 배어 나오게 되기까지 작가는 오랜 세월을 침묵 속에 견뎌야 한다는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생각과 손이 한치의 틈도 없이 하나를 이루는 것, 작가의 생각이 독자의 머리에 부지불식간 살포시 얹힐 수 있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나 그 책을 읽는 사람이나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작가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어느 것 하나 툭 불거져 뒤뚱거리는 것이 없다.
1부 내 생애의 밑줄, 2부 책들의 오솔길, 3부 그리움을 위하여의 총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에서는 교외 생활을 하는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지난 기억들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도 문학강연 같은 걸 하게 될 때는 소설이 지닌 이런 미덕, 쓰는 이와 읽는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위안과 치유의 능력에 대해 말하곤 한다. 나는 내가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부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 (P.24)
작가는 당초에 되고 싶었던 건 소설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무엇인가 써야만 견딜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꾹꾹 눌러 참았던 가슴 속 응어리가 한순간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려 할 때, 그렇게라도 외지치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누군가 낯 모르는 사람의 멱살이라도 부여잡고 꺽꺽 울고 싶던 심정을 소심한 성격 탓에 그 맺힌 이야기를 원고지에 옮겨 적을 수 밖에 없을 때, 쓰는 이와 읽는 이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 같이 공감하게 되고,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서로의 아픔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글이 구르고 굴러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모난 구석 없이 둥글둥글 다듬어지면 비로소 독자의 머리에도 작가가 품었던 파란 물이 드는 것이 아닐까?
2부에서 작가는 자신이 읽고 기억에 남았던 책들을 기록하고 있다.
문태준의 시집<그늘의 발달>,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 박경리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다. 작가는 이 글들을 소개하는 첫머리에서 자신의 글이 서평도 독후감도 아니라고 했다.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입니다. 나이 들면서 숨가쁘게 정상으로 끌고가는 책보다는 도중에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에 더 정이 갑니다." (P.183)
3부에서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이어진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박경리 여사님 그리고 박수근 화백, 세 분 모두 작가와는 이승에서 연을 맺은 각별한 관계인 듯하다. 80줄에 들어선 작가의 연세를 생각할 때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곁을 떠나는 그리운 이들에 대한 작가의 글은 밀어내고 싶은 거부감이 올라온다.
세월을 거슬러 오래도록 작가의 글을 읽고 싶은 나의 욕심이 헛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생각해보니 선생님과는 한 번도 허튼 수작을 해본 적이 없네요. 농담 한 번 안 하고 이 풍진 세상 그 힘든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선생님이 가여워졌습니다. 이런 걸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연민이라 한다면 너무 외람될까요." (P.255)
박경리 여사의 추도문을 읽으며 나는 그분께 투영된 작가의 세월을 보았다.
산다는 것은, 먼지처럼 쌓이는 구질구질한 일상을 나만이라도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기억하고 보듬는 일이다. 내가 진정 힘써야 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이 지구별에 살다 갔다는 작은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기상청 일기예보는 오늘 요란스레 비가 내릴 것이라 했다.
그리고 생뚱맞게 겨울 황사가 몰려온단다. 거친 일기(日氣)에도 오늘을 살아내는 수많은 군상들은 또 얼마나 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