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뉴스를 보면 교육부와 얼마 전 당선된 진보 교육감 사이에 불미스런 문제가 심심찮게 불거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교육의 문제가 어찌 그뿐일까마는 학생을 둔 학부형의 입장에서 아이의 교육을 생각할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기업 프렌들리를 정책 기조로 삼는 현정부와 학생의 자율이나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 교육감의 시각에서 사뭇 이데올로기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계은행이 공개한 2009년 세계 경제 규모 순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8325억달러로 세계 15위에 이른다.  2003년에 11위를 기록했지만, 해마다 뒷걸음질쳐 현재에 이른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이러한 추세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암울한 전망을 낳게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960년 6.0명에서 2008년 1.19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고 가정할 때 2020년이면 우리나라의 전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2050년에 이르면 현재 인구보다 600만명 정도가 줄어들고, 2300년에 이르면 전체 인구가 5만명이 된다고 한다.  알다시피 한 국가의 전체 인구는 기업의 입장에서 노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것이다.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의 감소는 기업과 소수 자본가에게 있어 사활의 문제이자 생존이 달린 문제이므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소비의 확대 재생산을 유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이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각각의 소비자로 하여금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다.  남보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가구,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대폰, 더 좋은 옷 등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와 경쟁의식을 부추김으로써 제품의 교체 주기를 더욱 짧게 만들 수만 있다면 제품의 소비는 인구의 감소에 따른 소비의 감소를 대체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릴 때부터 경쟁을 학습시키는 일련의 교육은 기업의 입장에서 필수적이다.
경쟁은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이기에 교육을 통하여 끝없이 경쟁의식을 주입함으로써 제품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의 완성이나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진정한 교육의 의미는 퇴색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유능한 인재 육성이라는 미사여구도 마찬가지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는 입사와 동시에 기업의 문화와 용도에 맞도록 육성되는 것이지 발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의 전문인력은 발굴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좋은(?) 소비자로 길러지고 있다는 자괴감은 나만의 생각일까?  구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휴대폰을 바꾸려 하고, 친구네집의 평수가 궁금하고, 다른 집의 차종을 궁금해 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교육계내에 존재하는 작금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아니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도구로 보느냐 아니면 삶의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 보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기업의 이익을 최상의 가치로 인식하는 한 우리나라 아이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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