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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ㅣ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선현의 글을 접할 때마다 내 지식의 일천함에 갑갑증을 느끼곤 한다.
다산의 서간을 번역본으로 읽으면서도 그 뜻을 이해함에 때로는 좌절하게 되니 내가 하는 독서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스무 살의 나이에 우주 사이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완전히 그 이치를 정리해내려 했다는 다산의 열정과 학문에 대한 의지는 부끄러움과 반성의 마음으로 이 글을 읽게 했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학문으로 밥 빌어 먹을 것도 아닌데 그까짓 것 배워서 뭐에 쓰겠냐고.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가 기르는 가축과 다름이 없다. 자식에게 밥 잘 주는 주인 만나는 법만 가르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람은 태어나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서로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여야 하며,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가장 큰 책무이자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무릇 독서하는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그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수백 가지의 책을 함께 보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읽어야 읽은 책의 의리를 훤히 꿰뚫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 점 깊이 명심해라.
다산이 유배지에서 그의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으로 인해 폐족의 자제가 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 때문에 남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아비로서의 부정이 듬뿍 묻어난다. 때문에 다산은 아들들의 학문을 더욱 독려하게 되고, 곁에서 돌보지 못하는 까닭에 가족간의 예법, 친인척간의 올바른 관계, 양계 및 양잠법, 친구를 사귀는 것과 술마시는 법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챙기고 있다. 유배지에서 겪는 외로움과 고달픔을 내색하지 않고 오직 자식들의 안위와 무사를 바랐던 다산의 진심어린 편지는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막내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애통해 하는 아비의 심정과 슬픔 속에서도 자신보다는 어머니를 챙기라고 간곡히 당부하는 모습에서 당대의 강직한 선비의 면모보다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자상함이 엿보인다. 이 책에서는 학문하는 자세와 삶에 대한 태도, 세상의 이치 등 우리가 되새기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 배어있다.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에 높이 올라 권세를 날릴 때에는 빨리 산비탈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處士)로서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벼슬길이 끊어지면 빨리 서울 가까이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P.148)
위 글에서 보듯이 권세가 높을수록 청렴하고자 했으며, 가난할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다산의 선비다움과 실학자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스스로 자기 재물을 사용해버리는 것은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고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물질로써 향락을 누린다면 닳고 없어질 수밖에 없고 형태 없는 것으로 정신적인 향락을 누린다면 변하거나 없어질 이유가 없다.(P.152)
이 책은 이처럼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형님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학문을 알아 주는 학문적 지기이자 선생으로서 존재하던 다산의 둘째 형님 정약전에게 보내는 편지 및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경전의 해석과 차용에 머물지 않고 대담한 비판과 끊임없는 그의 탐구정신은 경서뿐 아니라 병법, 천문, 지리, 역사, 농법 등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학문적 범위를 가능케 했다.
생계가 어려운 제자들에게 선비다운 농사법을 전수하는가 하면 목민관의 자세와 방법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 대사상가로, 실학자로서 다산을 평가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자상한 아비로, 우애로운 동생으로, 또는 위대한 스승으로 우리는 다산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아직은 어려 대화가 쉽지 않은 아들에게 나의 생각과 권하는 말을 편지로 남기고 있다. 어느 아비나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 전하고 그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시키려 노력할 것이지만, 다산의 편지를 읽으며 진정한 아비다움은 학문에 대한 의지와 끝없는 노력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수양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 것이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이 두 마디 말을 늘 외우고서 실천한다면 크게는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작게는 한 가정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