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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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감각의 모공이 활짝 열리게 하는 책은 그리 흔치 않다.
활자의 조직이나 배열이 내 머리 속에서 뱅맹 맴을 돌다가 안개 자욱한 아침의 풍경처럼 흐릿한 모습을 잠시 비추고는 미안함을 감추려는 듯 금세 사라지는 책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마치 신경 시냅스를 활자에 걸어놓은 듯,  나는 오직 다양한 형상이나 체험을 경험할 뿐 읽고 있다는 의식은 전혀 하지 못했다.  활자를 읽음과 동시에 펼쳐지는 다양한 이미지와 체험의 현장은 마치 순간적으로 피어나는 나팔꽃과 같았다.  
이 책은 건강을 위해 많이 걷기를 권장하는 책도,  도보 여행자의 짐꾸리기나 여행지를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도 아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저자는 장 자크 루소, 피에르 상소, 패트릭 리 퍼모, 로리 리, 그리고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와 스티븐슨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걷기의 깊은 맛을 제공하고 있다.   그 주옥같은 글귀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광천수의 첫 모금은 문자 그대로 내 입속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입속에서 별 모양의 서리들이 되어 흩어졌다.  햄 한 접시와 헤레스산 셰리주가 몇 잔 나왔다.  감미로운 무기력이 전신의 뼈끝마다 잠처럼 퍼져갔다. (P43)
우리에게 걷기는 장소 이동의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인에게는 두 발은 써먹을 기회가 너무나 드물어서 많은 경우 처치곤란한 존재가 되어버린 나머지 조그만 가방 속에 담아 한쪽으로 치워놓아도 괜찮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머리만 존재하고 가슴을 잃어버린 인간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  획일화 된 풍경, 획일화 된 가치관 속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미적 체험의 기회는 점점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 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P.237)
이 책의 저자는 도시인이 지향하는 내적 소실점, 걷기를 통한 침묵의 장 또는 그 고즈넉함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지도상의 작은 선이 아닌 마음으로 향하는 내밀한 이야기요,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기억과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은밀함이요,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이 책은 인간의 원초적 행위인 걷기를 통하여 자연의 희로애락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피조물인 인간이 우주의 품으로 다시 회귀하는 자연스런 본능은 어른들 대화에 한 마디라도 끼어들고 싶은 아이들의 천진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낭만’이라는 도시적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한 것이어서, 미하엘 엔데가 들려주는 <끝없는 이야기>나 알퐁스 도데의 <별>처럼 도시인들에게는 심드렁한 이야기들에 신비를 덧씌운 미세한 속살거림, 또는 싫지 않은 지루함이 밤새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P.253)
나는 내 삶이 어느 날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내팽겨쳐졌다고 느낄 때 이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더듬게 되리라 예감하고 있다.  침묵 속에서 어느 고즈넉한 숲길을 걷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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