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탄생과 더불어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현생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루의 체험을 통해 내게 주어진 기억들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음 생을 위해 그 기억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게 맞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는 그렇게 현생의 기억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음 생을 위해 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말하자면 체험을 통해 기억에 대해 확인하는 절차와 망각을 통해 다음 생을 준비하는 일련의 상반된 행위들로 채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는 것입니다.
침묵의 한 허리를 베어 내려는 듯 눈이 내립니다. 어제 내린 눈 위로 다시 쌓이는 눈송이들. 연초에 내리는 눈을 일컬어 예로부터 우리는 풍년을 예견하는 서설(瑞雪)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을 통한 이동이 보편화된 요즘 눈은 단지 교통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애물일 뿐 풍년에 대한 기대나 눈발에 섞인 고요를 감상하는, 그런 낭만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명절 연휴에 내리는 폭설이라니요! 내리는 눈을 막거나 제지할 방법이 따로 없는 까닭에 우리는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게 됩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섞여 이따금 설 명절을 준비하는 음식 내음이 전해집니다. 아파트의 어느 집에선가 전을 부치고, 생선을 굽고 있을 테지요.
얼마 전에 읽었던 산문집 <미오기傳>에 대한 여운이 남아 김미옥 작가의 다른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고 있습니다. 작가가 읽었던 책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 이 책은 다른 이의 서평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책에 대한 작가 자신의 생각이 주가 되는 것은 맞지만 책을 읽었을 때 떠올랐던 자신의 기억이나 생각을 주로 담았던 까닭에 제시하는 책의 성격이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서평이 채워지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작가가 서평을 빙자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엄마는 납골당을 무서워했다. 유골함이 찬장 안에 들어가 갇힌 거라고 여겼다. 둘째 오빠의 납골당에 다녀온 후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설날 아침에 엄마는 형제들 앞에서 나를 붙들고 울었다. 땅 한 평 없는 이내 신세, 양념통보다 못한 이내 팔자, 뜨거운 불에 태워 손바닥만 한 찬장에 넣지 말고 차라리 길에 뿌려라. 술 취한 형제가 빚쟁이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이 집안에 빚이 있었다. 부채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형제들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을 다녔지만, 손가락만 잃었다. 대출을 받아 식당도 했지만 망했다. 가출하기 전날 내 책을 찢으면서 엄마는 울었다. "다른 집 딸들은 오빠들 뒷바라지로 집안을 일으킨단 말이다." 최종학력 국졸인 세 오빠 중 한 명은 자살했다. 엄마와 살고 있는 두 형제도 암 투병에 알코올중독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합니다. 우리의 삶이 태어나면서 누군가로부터 받은 온전한 기억들을 삶을 통해 하나하나 재현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라면 김미옥 작가는 정말 제비뽑기의 운이 지지리도 없는 박복한 여인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고 책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휘몰아치던 눈발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눈발의 세기가 약해졌다 강해지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김광림의 시 '산 9'가 떠오릅니다. '한여름에 들린/가야산(伽倻山)/독경(讀經) 소리/오늘은/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비로소 벙그는/매화(梅花) 봉오리//' '어' 하는 사이에 2025년의 새해도 벌써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까치설날', 눈보라에 섞여 제수용 전 내음이 진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