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평점 :
인간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한 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관련 자료를 훑어보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문득 이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어느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이야기를 매개로 지각을 펼치고 세상을 탐지한다. 이야기는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며, 생물학적 생존 이익에 기여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으로 빚는 강력한 요소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이 영웅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우리 삶의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의 소설 <작별 인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능이 인간 삶의 유한성과 결합하여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유한한 삶에서는 결코 체험하지 못할 수없이 많은 다른 인생과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 더 강한 유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다른 인생이 내가 살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생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호기심은 두 배 세 배 증폭되는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독자는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된다.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 이런 종류의 낯섦을 처음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p.176)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비교적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현학적이거나 작가 개인만 알 듯한 특이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나 학교 선후배를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 혹은 나의 삶에서도 있었던 유사한 경험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산문집 전반에 흩어져 있다. 시인은 으레 사물이나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극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편견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깨트릴 수 있다. 애초부터 그런 편견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 봄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다시 겨울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은 시인의 일상 역시 독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책을 쓴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시인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책으로 읽는 까닭은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무료한 일상을 독서로 때우고자 함도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동지 의식 혹은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12월이 다가온다. 다가온다고 적으니 벌써부터 긴장이 감돈다. 물론 가장 아무것도 아닌 12월이 될 것이다. 가장 아무것도 아닌 선물을 또 누군가에게 줄 것이고 받을 것이다. 가장 시시한 일을 하며 가장 시시하게 지낼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12월은 무작정 설렌다. 왜 그런가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장 시시함에도 가장 설렐 수 있다는 것은 무조건 축복이고 무조건 내게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p.250)
우리는 비단 우러러보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의 특별한 일상만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의 일상도 궁금하여 때로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별것 아닌 각자의 일상도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궁금해하는 소중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결코 허투루 다룰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