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 사람들의 주제와 관심사는 단연코 첫눈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압수수색 하는 날 웬 눈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지방 출장 갔다 와야 하는데..." 하면서 발을 구르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은 펑펑 쏟아지는 첫눈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젖거나 첫눈에 얽힌 몇몇 장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첫눈이란 누구에게나 특별한 감정을 던져주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 역시 신체와 별반 다를 게 없어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메마르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어찌할 수 없는가 보다.


사무실 근처의 한 중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어릴수록 눈에 대한 상상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상력과 기쁨은 하루가 다르게 감소하고 손에는 눈처럼 텅 빈 허무와 아쉬움만 덩그러니 남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눈에 대한 상상력을 모두 잃은, 냉랭한 시선의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빅토리아 베넷이 쓴 <들풀의 구원>은 아름다운 책이다. 오늘처럼 눈보라가 몰아치고 옛 기억이 눈처럼 쌓여, 나의 휑한 가슴에도 그리운 이의 말과 추억이 소복소복 쌓이는 날에 읽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그런 책이다.


"어머니의 삶이란 무엇으로 측정될까? 드러나지 않은 사랑의 행위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가 뒤늦게야 잃은 것의 무게를 마치 손에 바다의 돌을 쥔 것처럼 느끼는 날까지. 나는 공책과 영수증과 작은 스크랩북을 낡은 패치워크 치마 자투리에 싸서 망가지지 않도록 보관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살아냈던 문자들이다. 과거로부터 내 펜이 조급하게 또각거리며, 말이 영영 사라져버리기 전에 우리 삶의 해설지에 뭐라도 적어넣고 싶어 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본다고,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 인생에 담긴 그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은 어머니가 매일같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선물이었으며, 어머니는 그 하나하나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 꿈의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얼마나 멋진 정원을 우리에게 만들어줬는지."  ('들풀의 구원' 중에서)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다. 낮에 내리던 진눈깨비는 밤이 되자 무게를 잃고 가벼워졌다. 그러나 삶의 무게는 밤이 되어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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